부친 작고 후 일거리 찾아 부평 신촌으로
애스컴에서 카투사 스낵바 운영한 모친
어머니 주선으로 부평 미군 병사들과 훈련
미군부대선 장비 지원, 동네에선 응원·후원
“엄마 챔피언 먹었어!” 한국 첫 원정 챔피언
좌절 딛고 ‘4전 5기’ 신화로 두번째 챔피언
“부평은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동네”
사각의 링 위에서 청코너와 홍코너 누구 하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치는 복싱을 인생에 빗대던 시절이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1976년 복싱 영화 ‘록키’(Rocky)가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그때는 현실 무대에서도 명승부를 만들어 내는 복서에게 열광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4전 5기’의 세계 챔피언 홍수환이 바로 한국의 ‘록키’였다.
1977년 11월27일 중남미 파나마의 뉴파나마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국의 홍수환과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가 맞붙었다. 1974년 따낸 WBA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을 이듬해 빼앗기고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홍수환이었고, 당시 11전 11승 11KO로 승승장구하던 카라스키야였다. 더군다나 카라스키야의 고국에서 열린 경기로, 홍수환에겐 마땅한 응원군조차 없는 완전한 적지(敵地)였다.
2회전 공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수환이 크로스 카운터로 날린 라이트훅이 빗나갔고, 카라스키야의 라이트 어퍼컷과 레프트훅이 홍수환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대로 다운된 홍수환은 잠깐 암전됐다가 카라스키야를 향한 파나마 관중들의 환호와 함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다시 일어나 심판의 카운트를 물리치고 양손 글러브를 맞부딪치며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더 강한 카라스키야의 레프트 어퍼컷과 훅으로 다시 다운됐다. 곧바로 일어섰으나, 또다시 링 위에 처박힌 홍수환. 승리를 예감한 파나마 관중들은 만세를 불렀다. 네 번째 다운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모습이었다.
겨우 2회전을 버텼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나선 3회전. 홍수환이 악착같이 휘두른 레프트훅이 카라스키야의 관자놀이에 명중한 순간, 그의 풀린 동공을 보고 기회를 찾은 홍수환의 연타가 50초 만에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렸다. 자신의 두 번째 챔피언 벨트를 매게 된 순간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홍수환은 세계 복싱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4전 5기’의 신화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부평은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동네야. 그래서 나는 부평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홍수환은 복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무렵인 1968년부터 자신의 첫 번째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1974년까지 7년여 동안 인천 부평구 부평동 ‘신촌’이라 불리는 미군기지 인근 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홍수환의 부평 시절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낸 동네를 ‘제2의 고향’이라 부를 만큼 끔찍이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달변이기도 한 홍수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미군부대 스낵바 운영한 어머니
홍수환은 1950년 5월 서울에서 4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광화문 근처인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홍경섭(1915~1964)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와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 사업을 했다. 홍수환의 부친은 신의주에서 모친 황농선(1921~1994)을 만나 일가를 이뤘다. 9살쯤인 1950년대 후반 집에 TV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홍수환의 이웃집에는 한국 페더급 2대 챔피언이자 수많은 복서를 길러낸 ‘바람개비’ 김준호가 살았다. 아버지는 김준호의 팬이었다. 홍수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김준호의 집으로 가서 난생 처음 복싱 글러브를 손에 끼었다. 그날부터 이웃집 아저씨 김준호에게 2~3년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1964년 8월4일, 중학교 2학년 홍수환의 생일날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유산이 조금 있었지만, 성인이 돼 먼저 분가한 형제들과 어머니가 나누고 나니 형편에는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홍수환과 나머지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충무로 4가, 영등포 등지로 이사를 다니며 살림을 꾸렸다. 그렇게 흘러 흘러 1968년 홍수환의 식구는 인천 부평에 정착하게 됐다.
“어머니가 나, 수덕이, 수철이, 수정이 이렇게 넷을 데리고 일거리를 찾아 부평으로 오게 됐어요. 어머니가 애스컴(부평 미군부대) 안에 카투사 전용 ‘스낵바’라는 식당 자리가 하나 나왔다는 얘길 들은 거예요. 거기 입점하고 싶은데 돈이 조금 모자랐어요. 미군부대 정문 앞에 ‘금해당’이라는 금방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금해당 사장님한테 동업을 제안한 거죠. ‘여기서 한 달에 얼마 정도 쓰면 얼마쯤 벌 수 있는데, 수도·전기 요금도 안 내도 되고, 기름도 준다’며 그 사장님을 끌어들였어요.”
그 당시는 주한미군 군수 보급 기지인 부평 ‘애스컴’(ASCOM·미 제24 군수지원사령부)이 서서히 축소되는 시기이긴 했어도 여전히 미군의 상당수 군수 보급은 애스컴을 통했다. 꾸준히 미군 병력과 물자가 드나들고, 카투사 또한 부평으로 집결했다가 전국의 미군부대로 흩어졌다고 한다.
홍수환의 어머니는 미군으로부터 카투사 전용 스낵바를 위탁받는 방식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애스컴으로 출퇴근하는 한국인 노무자나 군무원이 신촌에 모여 살았다. 신촌은 미군부대로 인해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을 가진 기지촌이었다. 미군부대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지역 경제 활동의 중심축은 애스컴이었다. 당시 애스컴의 규모는 현재 남은 캠프마켓 부지 면적(약 44만㎡)만 생각해선 안 된다. 캠프마켓 주변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과 공원 일대가 전부 미군부대(옛 일본육군조병창·약 330만㎡)였다고 보면 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18년 발간한 ‘인천 미군기지와 양키시장’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무자로 구성된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외기노조) 부평지부 조합원은 1965년 기준 3천166명이었다. 부평지부를 비롯해 인천 전체 미군기지의 외기노조 조합원은 5천680명에 달했는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포함하면 훨씬 많은 사람이 미군부대를 일터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들로 시장이 형성됐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는 주민도 많았다. ‘양색시’라 불린 미군 위안부 여성들도 신촌에 살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할 수 있는 얘기 같은데, 우리 어머니가 자식들 먹고 살리려고 생활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다 미군 물건 빼돌린 거야. 애스컴이 병참기지니까 군복, 버터, 치즈까지 없는 게 없었어요. 어머니가 이런 걸 부대 밖으로 갖고 나와서 팔았어요. 미군부대는 철망을 둘러 보초를 세울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죠. 그러니 어머니 같은 사람이 귀하지. 동네에는 양색시도 많았고요. 미군부대 정문은 초라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앞에 우리가 살던 동네는 더 초라했고요.”
워낙 미군 물자를 빼돌리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미군부대는 가시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홍수환의 기억은 문학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원규 작가의 단편 소설 ‘겨울새’(1987년)는 작가의 유년기 경험이 녹아있는데, 소설 속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애스컴 풍경은 이랬다.
“철마산 너머는 온통 미군부대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군부대는 탄탄하게 쌓은 시멘트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여기저기 원두막처럼 세워진 망루가 있고, 그 위에는 총을 든 미군이 서 있었다. 담장 위에는 가시 철망이 둘둘 말려 얹혀져 있고, 곳곳에 ‘경고! 미국 정부 재산. 접근하면 발포함’이라는 우리 말이 미국 글자와 함께 쓰인 간판이 붙어 있었다. 꼭 큰 드럼통의 배를 갈라 엎어 놓은 것 같은 함석 건물이 부대 정문을 통해 들여다 보였다.” (소설 ‘겨울새’ 중에서)
“나는 부평이 만든 챔피언”
홍수환은 부평에 정착했을 즈음 정식으로 복싱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어릴 적 함께 복싱을 배웠던 이웃집 김준호의 아들 택구를 다시 만나면서부터다. 부평역에서 서울 체육관을 오갔다. 아마추어 선수 전적은 2전 2패로 신통치 않았다. 1969년 5월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프로 복싱 데뷔전을 치렀지만, 무승부에 그쳤다. 1승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부평 미군부대에서 아들과 미군 병사들의 연습 경기, 훈련을 주선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부대 안에서 카투사 스낵바 가는 길에 체육관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권 씨라는 체육관 담당자와 친했고요. 어느 날 권 씨가 체육관을 관리하는 미군 중사 톰 케이시에게 ‘저 여자 아들이 복싱 선수’라고 알려 줬는데, 톰이 어머니에게 곧 있을 범태평양 군인 복싱 대회에 선수 한 명이 모자르니 출전해 보라고 제안했죠. 그때 국내 프로 복싱은 4회전인데, 이 시합은 아마추어로 3회전만 뛴다고 하니 부담도 없고 좋다고 했어요. 결국 시합에 출전했고, 미군 병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잘했죠.”
홍수환은 미군부대에서 다양한 미군 병사들과 스파링을 했다고 한다. 그가 국제 경기에 출전해 낯선 외국인 선수와 맞붙어도 이질감이나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다. 영어도 배웠다. 복싱 장비도 후원받았다. 홍수환이 쓰는 붕대, 마우스피스, 헤드기어, 복싱 슈즈, 트렁크 등이 전부 ‘미제’(미국산)였다. 국내 대회에서 경기할 때는 “신인 선수 놈이 트렁크도 반짝거리는 공단(고급 비단)이고 신발도 미제를 신네”라며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초창기 홍수환의 후원자 역할을 한 톰 케이시는 제대 후 한국에 정착해 사업가가 됐다. 가끔 홍수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홍수환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평역과 십정동 사이 철길을 뛰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은 뒤 곧장 서울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신촌에 있던 미군 클럽에도 출입해 아직 서울에 전파되지 않은 최신 팝송을 들었다.
“드림보트(Dreamboat)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매킨토시(Mcintosh) 진공관 파워 앰프(MC275)에다 스피커 여섯 짝을 묶어서 음악을 틀었어요.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1968년) 같은 곡을 들었어요. 흑인들은 음악이 나오면 가만히 있질 않잖아. 그 리듬을 타는 게 얼마나 멋있던지, 아마 내가 시합에서 하는 부드러운 몸동작은 미군 클럽에서 들은 음악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부평 신촌 일대에는 미군 병사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클럽이 여러 곳 있었다. 한때 20여 곳에 달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평 미군기지가 축소·해체되면서 클럽들은 점차 문을 닫았으나, 1990년대까지 영업한 미군 클럽도 있었다. 홍수환이 기억하는 드림보트 클럽은 백인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바로 옆 송도홀은 흑인 전용 클럽이었다고 한다. 미군 병사들과 친분이 있던 홍수환은 이 두 곳을을 모두 드나들었다. 신촌의 미군 클럽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았던 드림보트 클럽은 1983년 음식점으로 바뀐 후 2020년까지 운영되다 그해 6월 신축을 위해 철거됐다. 당시 드림보트 클럽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지역사회 목소리가 있었지만, 철거를 막진 못했다.
프로 선수로 이름값을 얻어 가던 홍수환을 신촌 사람들이 돕기도 했다. 홍수환 가족은 신촌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던 집에 세들어 살았다. 그 집 주인의 자녀들과 친척들은 ‘차차차 오남매’라는 가족 밴드를 만들어 서울과 부평 미군부대 등지에서 공연을 했다. 드러머를 맡았던 그 집 장남 차경수(당시 대학생) 씨가 대학생들을 모아 홍수환 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훗날 차경수 씨는 의사가 된다. 당시 동네 정육점에선 경기 전 날 홍수환에게 고기를 사줬고, 동네 병원 원장은 경기가 끝난 후 ‘링거 주사’(영양제 수액 주사)도 놔줬다고 한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다
홍수환은 1974년 7월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웨스트리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WBA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남아공의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15회전 판정승을 거두며 왕좌에 올랐다. 한국 최초로 복싱 원정 경기에서 챔피언을 따낸 선수로 기록됐다. 이때 홍수환은 육군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에 복무 중인 현역 군인(일병) 신분이었다.
이 경기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건 홍수환이 승리한 직후 한 방송사가 건넨 수화기를 통해 어머니 황농선 여사에게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다!”라고 외친 장면 때문이다. 이어 황농선 여사가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화답하는 장면을 방송을 통해 온 국민이 지켜봤다.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던 산업화 시기 전해진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였을 터다.
“그때 동행한 김준호 선생님하고 서울에서 일본, 홍콩, 실론(스리랑카), 세이셸,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더반까지 수일 동안 비행기를 탔어요. 비행기 안에서 먹지 못해 배가 고픈 기억밖에 없어요. 얼마나 배고픈 시절이었으면 챔피언도 ‘먹었다’고 했겠어요. 국력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시 외국 프로모터가 한 달에 두 번씩 시합을 잡기도 하고, 자기네 나라 선수에 유리한 대로 시합을 잡았어요. 적지에서 그 불리함을 뚫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배고프고 못살던 시절에 챔피언이 많이 나왔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큰 거예요. 그 시절엔 그만큼 절실했어요.”
현역 군인이 첫 원정 세계 챔피언이 되고 그의 어머니가 방송에서 “대한국민 만세”를 외쳤으니, 청와대에서 관심을 가질 만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홍수환이 귀국한 김포국제공항에 자동차를 보내 홍수환과 어머니 황농선 여사를 모시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홍수환의 큰형이 동승했다. 어머니가 “우리 맏아들도 태워달라”고 현장에 나온 정부 관계자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대통령은 홍수환과 어머니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주변에서 대통령이 금일봉을 줄 거란 얘기를 들어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청와대에 가니 박 대통령이 봉투를 내밀었고, 저는 그걸 받으려고 몸을 숙였어요. 아니 글쎄, 그 봉투는 저희 어머니한테 주는 금일봉이었던 거예요. ‘홍수환 선수가 이렇게 된 건 다 어머니 덕분’이라면서요. 그걸 받으려고 몸을 숙인 저도, 어머니에게 봉투를 내민 박 대통령도 모두 얼굴이 빨개졌어요. (웃음) 육영수 여사도 직접 나와 어머니를 치하했어요. 그날이 1974년 7월18일이었어요. 날짜도 잊지 않아요. 그날이 있고 한 달 뒤 육영수 여사가 피살됐으니까요.”
홍수환이 더반에서 타이틀전을 치르기 직전인 그해 5~6월쯤 가족은 평택으로 이사했다. 부평 미군기지가 축소되면서 카투사 스낵바도 철수했는데, 홍수환의 국내 경기 대회장을 맡아 준 적이 있는 미군 고위 장교가 홍수환 어머니에게 평택 미군부대의 카투사 식당으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홍수환은 “평택 사람들은 나를 모르고 부평 사람들이 나를 아는데, 챔피언이 될 때 하필 평택으로 옮겨서 아쉬웠다”고 했다.
이후 인천과의 인연은 조금 뼈아프다. 1975년 3월14일 미국에서 열린 WBA 밴텀급 챔피언 2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알폰소 자모라에게 지면서 타이틀을 빼았긴 홍수환은 이듬해 10월16일 한국에서 자모라와 리턴 매치를 벌인다. 경기 장소는 아시아 최대 규모로 ‘맘모스 체육관’이라고도 불린 인천 도화동 선인체육관이었다. 무리한 경기 일정과 경기 당일 좋지 않은 컨디션, 멕시코 국적 심판의 편파 판정이 겹쳐 12회전 TKO로 패했다. 홍수환의 형이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다 몸싸움이 일어났다. 멕시코대사관 쪽에서 홍수환의 처벌을 요구했고, 결국 그의 형이 인천구치소에 보름 동안 수감됐다고 한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는 것 같던 홍수환은 록키가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 계단을 뛰어오르듯 절치부심하며 꼭 1년 후 ‘4전 5기’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는다. “자모라에게 두 번이나 진 것에 감사해요. 그때 자모라를 이겼으면 ‘4전 5기’ 시합도 없었어요. 자모라한테 졌기 때문에 한 체급을 올려서 두 체급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거죠.” 두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후에는 인천체육대학(현 인천대학교)에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인천체대를 운영한 선인재단이 당시 인기 복서들을 학생으로 영입했다고 한다.
홍수환은 1980년 12월19일 염동균과의 경기를 끝으로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았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총 전적은 50전 41승 4무 5패, 14KO다. 은퇴 후 잠시 미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해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각종 방송에도 출연했다. 한국 복싱계의 부조리를 뜯어고치고자 2007년 말 복서들 모임인 한국권투인협의회를 구성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권투위원회(KBC) 22대 회장을 지내면서 행정가 면모도 보였다. 다독가이면서 책을 2권이나 썼다. 그가 낸 책 제목은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2003·해토), ‘링보다 인생이 무섭더라’(2006·조은친구들)이다.
복싱 선배들이 항상 하는 말이 ‘쟤 잽에 갔어’예요.
연습을 게을리하면 잽에 맞고 가는 거예요.
연습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지지 않아요.
복싱에서 제가 배운 겁니다.
1994년부터 2014년까지 장소를 막론하고 무려 2천회 넘는 강연에 초청받은 명강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사각의 링’ 위에 섰던 경험을 인생론이나 기업 경영론과 연결 짓는 그의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바쁘게 지낸다. 올해는 첫 챔피언이 된 지 50주년이자 그의 아내인 가수 옥희가 ‘나는 몰라요’로 데뷔한 지 50주년이다. 오는 12월 30일 그랜드 하얏트 서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개최하는 ‘옥희·홍수환 50주년 디너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인생도 청코너, 홍코너가 있잖아요. 정치도 청코너와 홍코너가 있고요. 그걸 중재해주는 심판이 있어요. 또 이기게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요. 성공과 실패가 있지만, 한 번이 끝은 아니죠. 이 링을 확대해보면 인생과 똑같다고나 할까요. 링 위에서 싸우기 위해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 노력은 연습이에요. 자잘한 매를 안 맞아야 해요. 조그맣고 사소한 일이라도 신경을 써야죠. 복싱 선배님들이 항상 하는 말이 ‘쟤 잽에 갔어’예요. 복서의 배는 잽을 맞고 질 순 없는 배거든. 그런데 연습을 게을리하다가 자주 치는 잽에 많이 맞으면 가는 거예요. 연습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지지 않아요. 복싱 속에서 제가 배운 겁니다.”
1950년 서울 출생
1963년 수송초등학교 졸업
1966년 중앙중학교 졸업
1969년 중앙고등학교 졸업
1968~1974년 인천 부평 거주
1969년 프로 데뷔
1971년 OPBF 밴텀급 챔피언(동양챔피언)
1974년 WBA 밴텀급 챔피언
1977년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1978년 인천체육대 체육학과 졸업
1980년 선수 은퇴(총 50전 41승 4무 5패, 14KO)
1995년 KBS 복싱 해설위원
2007년 한국권투인협의회 초대 회장
2014~2021년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