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헌재 탄핵소추 심판

시빗거리 생길라 변론 기일 늘려

한국과 경쟁하는 국가만 어부지리

‘서투르고 졸렬해도 빠른 게 좋다’

손자병법 ‘병문졸속’ 통찰 새길 일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신선 놀음은 바둑을 가리킨다. 그러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정도로 삼매경에 빠진 이는 누구일까. 정답은 신선이 아니라 나무꾼이다. 도끼의 주인 아닌가. 신선은 그저 한나절 두었을뿐인데 속세의 세월은 한 갑자(甲子)나 흐른 것이다. 바둑을 두는 쪽보다 구경하는 쪽이 무릎을 쳐가며 빠져든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네 정치는 다르다. 여야 정쟁은 해를 넘겨도 계속된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1분1초가 짜증이다. 대화와 협상은 없다. 끝없는 막장 대치에 생산성은 제로이다. 협치는 도울 협(協)이 아니라 좁을 협(狹)이나 으름장만 놓은 협치(脅治)로 보인다.

요즘 일주일에 두 번 진행되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 심판은 더하다. 한겨울임에도 불쾌지수가 치솟는다. 막장 드라마면 욕하면서 보겠지만 알맹이도 없고 재미도 없는 생중계를 어찌 해야 하나. 법이 없이도 살면서 실제로 법정 구경을 못해본 시민들이 처음에는 신기한 듯 구경했다. 내심 청구인 국회 측과 피청구인 윤석열 대통령 측의 날 선 공방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용현 전 국방장관이 증인으로 출석한 첫날부터 기대는 빗나갔다. 전 국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의 비상계엄 선언과 무장군인이 국회 창문을 깨뜨리면서 침입하고 우원식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 의사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봤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항변한다. 계엄령은 계몽령이며, 국회의사당에서 끌어내라고 한 대상은 의원이 아니라 요원이라고 한다. 시민들은 계몽 대상도 아니고 의원과 요원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오히려 계몽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계몽 대상이다. 요원이라고 했다는 주장은 건장한 군인들을 난청 환자나 바보로 취급하는 거다.

뭔가 새롭거나 의미 있는 사실은 없다. “발언이 제한된다”는 생소한 화법으로 증언을 거부하거나 지엽말단 말꼬리잡기뿐이다. “체포의 체 자도 말한 적 없다”면서도 “잡아서 끌어내라”는 지시는 부인하지 않는다. 주먹으로 치라는 것과 때리라는 것은 다른 말인가. 업어 치나 메치나, 계란이나 달걀 차이 아니겠나. 특히 정부의 핵심 요직에 있던 각료와 고위직들이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럽다. 이런 수준의 공직자들이 국익 우선주의의 거칠어진 바다에서 대한민국호(號)를 책임졌거나 지금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TV 드라마였다면 벌써 조기 종영했을 것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극히 비교육적인 내용이어서 심야에 ‘19금’을 붙여 지연 방송하는 게 낫지 않을까. 국민은 안중에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빤한 거짓말을 얼굴색도 안 바꾸고 늘어놓는 모습을 생중계할 필요가 있나.

더욱이 공(功)은 부하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신이 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사회의 덕목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의 “모든 일은 내 책임”이란 패는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 궁금하다.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면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결국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가. 무엇보다 K브랜드가 세계속에 우뚝 자리잡아가고 있는 가운데 K-정치가 국격을 실추시키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손자병법에 병문졸속(兵聞拙速)이 있다. 위중하고 시급한 상황에서는 비록 서투르고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다는 거다. 졸속의 반대는 교구(巧久)로 ‘교묘하고 훌륭하게 오래 끈다’는 뜻이다. 비록 전쟁에서 훌륭하게 대처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오래 끌게 되면 오히려 나쁘고 손해라는 통찰이다. 지금 우리는 헌정질서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아마도 헌법재판소는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변론 기일을 늘리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갈라진 국론은 건널 수 없는 크레바스로 벌어질 것이다. 이는 자멸의 길이고, 한국과 경쟁하는 모든 국가들에게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이다. 헌법재판소는 교구(巧久)보다 졸속(拙速)을 강조한 손자의 통찰을 새길 일이다.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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