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두개의 손끝, 꿋꿋하게 100년을 지키다
페랭 신부 피·땀 담아 쌓아올린 건축물
1929년 봄 착공… 당시 1만8000원 소요
충청도 최초 본당… 충남 기념물 145호
로마네스크 양식 벽돌조… 견고함 자랑
쌍둥이 종탑 특징, 현재 관광지로 각광
박해땐 순교 장소 韓천주교 발상지 역할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됐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됐다.
초기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충청 최초의 본당인 합덕성당은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출발해 1899년 현재의 위치에 390여㎡(12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이전했다.

■ 합덕성당의 시작 ‘1929년’
1929년 페랭신부가 현재의 벽돌로 고딕 성당을 신축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당은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됐다.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성당은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으며, 창의 아래 부분과 종탑의 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일반인들의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본당 관내에는 복자 원시장·시보 형제의 우물, 복자 김사집의 비방구지 마을, 양촌공소, 세거리, 상리, 하흑공소 등 유서 깊은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성당 건축
페랭 신부가 부임하던 1921년에 합덕 본당의 신자는 2천명을 넘었기에 퀴를리에 신부 때에 지어진 한옥 성당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런 정황을 잘 알았던 페랭 신부는 적어도 1925년 이전부터 새 성당의 건축을 계획했다. 예상되는 비용은 적어도 2만엔 이상일 것으로 추산해 기금을 모았다. 신자들도 헌금을 많이 했지만 그 막대한 건축비의 대부분은 페랭 신부 사재로 충당했다. 자신의 생활비는 가능한 절약하고, 미사예물로 받은 돈은 자기 사용(私用)으로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두었다가 성당신축기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돌의 성당(eglise de pierres)이 아닌 영혼의 성당이 지어지기를 바랐다.
성당 건축은 1929년 3월 봄부터 시작됐다. 1922년 공세리 성당이 지어지는 것을 지켜 본 것이 합덕 성당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됐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당 터의 나무를 베어내고 정지작업이 진행됨과 동시에 중국 기술자들이 1만200장의 벽돌을 구워내어야 했다. 이러한 때에 보좌 신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당시의 사정은 그러하지도 못했다.
목재가 도착하면서 5월에 이르러 창과 문틀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마루에 쓰이는 단단한 목재는 미국(Oregon)에서, 창과 문틀을 제작하기 위한 나무는 중국에서 수입됐다. 기후변화가 심한 한국 풍토에 적합한 목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건축을 위해 동원된 기술자들은 중국인들이 26명, 벽돌공 8명, 목수 3명이었다. 성당 건축에는 신자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면 봉사했다. 노력 봉사뿐만 아니라 익명으로 6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기증한 이도 있었다.
성당 건축에는 총 1만8천원이 소요됐는데 당시 쌀 1천800가마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외부의 원조 없이 본당 신자들과 페랭 신부의 노력으로 지어졌다. 공사는 터를 잡을 때부터 대단했다. 당시로서는 그와 같은 큰 공사를 보는 것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성당은 1929년 가을에 완공되어 10월 9일 봉헌식을 가졌다. 봉헌식이 있던 날을 전후해 합덕 주변은 수천 명이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봉헌 당시의 성당은 종탑 2개가 있는 장방형의 단순한 구조였다. 양 날개의 출입문, 제대 뒷면의 지성소 부분, 종탑의 뾰족한 부분은 페랭 신부에 의해 10년 후에 추가로 지어졌다.
새 성당의 봉헌은 건물만의 완성이 아니라 합덕 본당이 안정기에 들어섰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페랭 신부는 부임 초기부터 교육을 통해 신자들을 끊임없이 이끌었고, 신심·활동단체의 조직으로 본당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자들이 급증하여 예산 본당을 분가시킬 수 있었다. 1929년 성당의 완공과 봉헌은 총체적 성장의 결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랭 신부 자신도 후일 본당의 과거를 뒤돌아보며 성당 건축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생각했다.

■ 당진본당 분할
1920년대 합덕 본당 신자가 꾸준히 증가한 결과로 1927년 예산 본당이 분가할 수 있었다. 페랭 신부는 1930년대 들어서도 본당을 안정적이고 열성적인 사목으로 계속 신자가 증가했다. 그 결과 1938년에 이르러 2천400명의 신자를 헤아리게 되어 예산 본당을 분가해주던 때(2천305명)를 능가하게 됐다.
당진에 본당을 설립하는 문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논의된 듯하다. 그러나 신부가 부족해 본당 설립이 계속 미뤄지다가 1939년 들어 비로소 실행됐다.
당진 본당의 설립 역시 예산 본당이 설립될 때처럼 합덕 본당 페랭 신부에 의해 미리 준비됐다. 예산 본당의 경우 먼저 성당 터와 사제관을 마련한 후 합덕 본당의 보좌 신부를 예산에 상주시키는 형태로 본당을 분리시켰다. 당진이 분리될 때는 합덕에 보좌 신부가 없었으므로 신부를 미리 파견할 형편은 아니었으나 본당 터와 성당을 위한 건물은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1938년 당진 초등학교가 교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현재의 성당 자리(당진읍 읍내리 507-2번지)와 교사 2동을 매입하여 성당 터를 마련함으로써 본당의 근거를 마련했다.
■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적 역할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합덕성당은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는 순교의 장소가 되기도 한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뒤뜰에는 성직자 묘지가 있다. 첫번째 묘지는 이 매스트르(1808~1857) 신부 묘이다. 성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이었다. 1852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전교하다가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하신 분이다. 두번째 무덤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묘이다. 1861년 우리나라에 입국, 전교하다가 병사하였다. 세번째 무덤은 백문필(패랭, 1885~1950)신부인데 1921년부터 1950년 피랍되기까지 계셨다. 현 성당 건물을 지은 분이다. 1950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 축일 준비를 위해 고해성사를 집전하다가 납치되었는데 시신은 현재 대전 사정공원 애국지사 묘에 묻혀 있다. 네번째 무덤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신부인데 1942~1945년까지 백문필 신부 보좌로 있다 병사했다.
합덕성당은 성소의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사제 33명, 수녀 54명, 수사 5명(수사 수녀는 1990년 통계)을 배출했다.
/대전일보=차진영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