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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짜장면에 어린 인천 화교의 역사

중국 노동자 한끼 식사서 ‘국민음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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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북석동 차이나타운내 짜장면 박물관. /계산여중 제공

임오군란때 화상 첫 상륙… 값싼 면요리 개발
해방이후 ‘인천 차이나타운’ 대표메뉴로 성장


화교는 해외에 사는 중국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화교가 인천에 오게 된 것은 지난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 화교 상인 40여 명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화교들은 중국에서 배추, 파, 오이, 고추, 미나리, 시금치 등을 들여와 키웠고 당시 조선에 없던 양파, 홍당무, 토마토 등도 재배하였습니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산둥성의 많은 이주자가 들어와 영세 상인이나 노동,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이들 중 중국인 노동자를 ‘쿨리’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인천항 부두에서 노동하는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값싼 중국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었지요.

비싼 요리를 먹을 수 없던 이들에게 삶은 국수 위에 중국 음식의 재료인 춘장을 얹어 준 것이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돼지고기와 갖은 채소가 추가되고 검은색 캐러멜로 바뀌면서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 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화상들을 견제하면서도 쿨리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지난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싸게 부릴 수 있는 쿨리로 조선인들을 대체하자 조선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습니다.

이런 적대감을 이용한 것이 ‘만보산 사건’입니다. 1931년 지린성 장춘 근처의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들이 충돌했는데, 중국 농민들 일부가 부상당한 이 사건을 일본 영사관에서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작해 기사를 제공했고, 조선일보가 이를 ‘만주 동포 200명이 중국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보도하면서 조선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잘못된 기사에 대한 정정 보도가 나왔지만 이미 쿨리로 인해 불만이 많았던 조선인들은 인천부터 평양, 서울 등지에서 화교를 공격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이 난’ 격이 됐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두 달 뒤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웁니다. 결국, 반중 감정을 일으켜 두 민족을 이간질한 뒤 만주사변과 지배에 우리 민족을 이용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화교들은 이승만 정부가 실시한 ‘외국인 외환거래 규제’, 창고 봉쇄, 화폐 개혁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폭격으로 화상들의 창고가 파괴돼 기반을 잃고 소자본의 중국 요릿집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또 박정희 정부 들어와서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및 제한’, 화폐 개혁, 짜장면값 동결 등이 이뤄지면서 화교들의 성장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1998년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등이 폐지되고 인천시가 차이나타운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화교들은 토지와 건물을 사기 시작했고 영주권과 지방선거 참정권도 갖게 되었습니다.

화교들이 인천에 정착한 지 150년. 역사는 짧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와 끈기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우리의 이웃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은 계산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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