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화성축성 과정 한글 표기·채색… '유일무이한 문헌'

정조시대 어람용 '정리의궤' 의미·프랑스 소장 발견과정
입력 2016-07-03 22:23 수정 2016-07-07 21:10
지면 아이콘 지면 2016-07-04 3면
정리의궤 살피는 방문단
경기문화재단 조두원 연구원,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 더불어민주당 안민석(오산) 의원,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왼쪽부터)가 파리동양언어학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리의궤를 살펴보고 있다. /안민석 의원실 제공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전혀 다른 책
기존 내용 요점정리뒤 '한글 번역'
순조때 필사본보다 앞서 제작추정

첫 한국부임 佛외교관 지니다 기증
파리동양어학교 '소장자료활용'
안민석 의원 협의중 존재 드러나


조선 왕조 의궤(儀軌)는 왕실의 중요 행사와 나라의 건축사업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의궤는 조선시대 500여 년(1392~1910)에 걸쳐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어 500여 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아직까지도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조선왕조 의궤는 지난 2007년 6월 제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의궤는 임진왜란 중 불에 타 사라져 버렸고, 조선 중기와 말기에 제작된 3천895권의 의궤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보관 중이다.

정리의궤(파리동양언어학원소장)
프랑스 파리동양언어학원에서 소장중인 정리의궤의 모습. 이곳에는 총 24권의 정리의궤가 보관돼 있다. /안민석 의원실 제공

■정리의궤(整理儀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서상기 문화재찾기한민족네트워크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안민석(오산) 의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전경목 교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 등은 지난달 27일 프랑스 국립파리동양어학교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방문해 두 기관에 소장된 '정리의궤 (整理儀軌)'의 실체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 부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묘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정리의궤'라고 지칭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정리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는 성질이 전혀 다른 별도의 책으로 밝혀졌다. 프랑스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리의궤는 말하자면 기존의 의궤에 있는 내용을 요점 정리한 뒤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은 물론, 완벽하게 '채색'까지 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파리동양어학교에는 정리의궤 12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1권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리의궤에는 '성역도(城役圖)'라고 표시돼 있는데 이는 어람용(御覽用) 의궤로 추정된다. 의궤는 보통 왕이 보는 어람용 1부를 포함해 총 9부 내외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열람을 하는 만큼 사고(史庫)에 보내는 일반 의궤보다 종이 질이나 완성도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또 목판인쇄가 아닌 한글 필사본에 채색이 돼 있어 기존의 사료를 뒤집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1827년(순조27)에 편찬된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를 유일한 한글필사본 의궤로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확인된 정리의궤는 1822~182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조선왕조 의궤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정조시대 혹은 정조 사후 편찬된 것으로, 한글본 정리의궤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고문헌으로 우리 한글사와 화성 축성 연구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한신대 김준혁 교수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정리의궤(성역도)는 화성성역의궤의 수권(首卷)에 수록된 화성 시설물의 그림을 채색한 것으로 도화서 화원들이 국왕을 위해 직접 그린 어람용 의궤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며 "화성 축성 과정을 한글로 표기하고 채색까지 한 어람용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은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 강조했다.

■정리의궤 어떻게 발견됐나

한글본 정리의궤는 1901년에 출간된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1865~1935)의 '한국서지(韓國書誌)' 초판본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직접 목격한 국내 학자가 전혀 없어 그동안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학자들이 프랑스 국립파리동양어학교의 소장 목록 일부를 입수해 정리의궤에 대한 존재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지난 2013년 미국 라크마박물관으로부터 문정왕후 어보 반환운동을 주도한 안민석 의원이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자료의 한국 내 활용 가능성과 방법 등에 대해 벤자민 기샤르 관장과 논의하던 도중 정리의궤 소장 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났고, 이번 프랑스 방문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정리의궤의 크기는 2절판(45×32㎝)으로 총 48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25권만 실물이 확인됐다. 이 책은 1887년 한국의 첫번째 프랑스 외교관으로 부임했던 빅토르 꼴랭 드 쁠랑시(Victor Collin de Plancy·1853~1922)가 갖고 있던 것을 파리동양어학교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안 의원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프랑스의 한 구석에 보관되고 있음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며 "외국에 유출된 우리나라 고문헌들에 대한 자료 조사와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빨리 한국 정부와 연구기관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프랑스 기관으로 가서 자료 정리와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 벤자민 기샤르 관장은 "한국 정부가 연구인력 지원과 자료 촬영 및 활용에 대해 동양어학교와 협약을 체결한다면 앞으로 연구 활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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