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친일 향한 선전포고'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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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대한자강회 활동·인명의숙 설립 등 인천 근대교육운동 앞장 불구
1천명 앞에서 목숨 끊어… 사이비 선각자 겨냥 '순교자 길' 택한듯
의연금 모집·추모 잇따르고 그가 뿌린 '씨앗' 사립학교 개교 줄이어
2000년대 중반 일생 복원 시작… 흩어진 조각 맞추기 과제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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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운동은 우리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자강론(自强論)'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계몽을 앞세워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정재홍(鄭在洪·1867~1907)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망국의 길목에서 친일로 변절한 개화파 박영효 앞에서 육혈포(권총)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일본으로 주권이 넘어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일세력을 향해 경고한 거였다. 

 

그는 인천 근대교육운동의 선각자인 동시에 의열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지사로 기억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정재홍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인천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

정재홍은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1907년 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몽단체다. 

 

대중 강연과 교육기관 설립, 국채보상운동 등을 이끌었다. 당시 경기도에서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 강화, 남양 3곳뿐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에 소속된 인천항 유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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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은 인재를 길러내야 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907년 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인천항의 사업가들이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정재홍은 학교 운영뿐 아니라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외국 유학을 돕기도 했다. 인명의숙은 1912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에 병합됐다.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계몽과 근대교육에 앞장섰던 정재홍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조국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어쭙잖게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친일의 경계에 선 주변의 동지들을 보며 큰 결단을 내렸다.

당시 일본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친일 관료와 지식인, 단체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관비 유학생 양성과 정치 망명자의 사면으로 한국 침략의 기반을 닦았다.

 

대표적인 예가 급진적 개화파 박영효의 사면(1861~1939)이었다. 명문가 출신 박영효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근대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지만,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07년 을사오적 박제순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아 귀국해 이완용 내각의 대신으로 일했다. 우국지사가 친일파로 변절한 순간이었다.

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서 농상소(農桑所)에서 열린 박영효의 귀국환영회를 거사 일로 잡았다. 

 

개화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영효의 귀국행사는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등 자강단체 임원들이 준비했다. 계몽을 가장한 친일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육혈포를 품에 숨긴 채 박영효의 귀국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환영회가 무르익을 무렵 연단에 올라 1천여명의 군중과 박영효 앞에서 자신의 복부를 향해 육혈포를 쏘았다. 정재홍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오후 8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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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이 자결하기 전에 쓴 어머니 전상서. /독립기념관 제공

그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저 대일본 보호 한국 국민 정재홍은 뜻이 있어 나라를 근심하는 우리 동포 모인 데 한 말씀 경고문을 삼가 드리노라.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그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에도 미치나 그러나 죽기 싫고 살기 좋은 인정이라 남으로 하여금 죽어 나의 살 명화를 도우려 하면 그 어찌 되리오 하나니 이곳에서 죽어 우리 동포 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게 하심이로다"라 쓰여 있었다.

정재홍의 자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사이비 선각자에 경고를 던졌다는 해석에 가장 무게가 실린다. 

 

그가 유서에 쓴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일본을 '보호국'으로만 여겼고 침략 야욕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결을 택했던 거다.

이 사건은 '박영효 살해미수', 더 나아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살해미수'였다는 확대 해석까지 나오는 등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교원 정재홍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나와 있다. 

 

황현은 이를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박영효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와 적수가 되지 않음으로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정재홍은 본래 강개한 뜻을 가지고 시국에 분개하여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고, 현재에도 학교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지사(志士)'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또 송상도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정재홍이 앞서 1907년 5월 일본에 갔던 이토가 조선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살해하기 위해 환영회를 열어 초청한 뒤 쏴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밖에 박영효 환영회 때 이토가 참석하면 총으로 쏘려 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토가 참석하지 않아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얘기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나온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도 이를 근거로 정재홍이 이토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썼다. 국가보훈처의 정재홍 공훈록도 이토 미수를 공훈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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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정재홍 자결 기사.

당시 정재홍의 품에서는 유서와 함께 '팔변가(八變歌)'라는 시가 나왔는데 "남을 죽이고 나만 살면 천리(天理)에 어긋난다. 죽이고 나도 죽자"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全國)이 느끼고 깨달으면 이 몸에 영화(榮華)되고, 나라에 행복일세"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그가 이토 또는 박영효를 암살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 희생이라는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 저격과 관련한 객관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단지 야사(野史)일 뿐 정사(正史)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정재홍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천의 유지들은 그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며 곧바로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전국 각지 인사들이 추모에 동참했다.

 

저격의 대상자로 볼 수 있는 박영효조차 조의금 50환을 냈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동휘를 비롯해 윤치오, 김동완, 석진형 등 당대를 대표하는 계몽자강론자들이 참석했다.

인천에서는 그의 죽음이 철시 운동과 일본인 가옥 방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무력 행위보다는 그가 씨앗을 뿌린 교육사업이 점차 확장됐다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사립학교 설립은 정재홍 사후 1년인 1908년 최전성기를 맞아 그해 명신학원, 흥인의숙, 명덕학원 등 7개의 사립학교가 개교했다.

정재홍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인천의 교육사에 남긴 발자국은 뚜렷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정재홍에 대한 기록이 생애 말년인 1906~1907년에 집중돼 있어 출생지와 학적 등 성장배경을 알기 어렵다.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장례가 정동교회에서 치러졌고, 인천에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독교인으로서 근대교육을 받았다고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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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정재홍 약전. /독립기념관 제공

물론 그에 대한 연구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계기로 인천의 인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묵 연구위원이 그의 일생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해리(1895~1945)가 그의 첫째 아들인 정종화와 동일인임을 밝혀냈고,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가 정재홍의 처남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인천의 유명한 연극인 정종원이 그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정재홍 일가의 흩어진 독립운동사 조각을 맞추는 것이 후대에 남겨진 과제다.

김형묵 연구위원은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천에서 계몽운동을 했고, 그가 설립한 인명학교가 창영초와 통합돼 나중에 인천 만세운동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인천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자결은 당시 대한자강회 등 계몽단체의 사회운동이 친일로 연결될지 모르는 때에 경종을 울린 의열투쟁이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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