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부평미군기지 '캠프 마켓' 땅을 인천시민 품으로 돌려받으면서 80년 동안 일본과 미국의 군사기지로 쓰이며 층층이 쌓인 역사성까지 물려받았다.
캠프 마켓은 동아시아 전쟁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 표 참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시켰다. 일본은 330만㎡ 규모 부평평야를 한반도 병참기지화 핵심 지역으로 낙점하고, 1939년 공사를 시작해 1941년 5월 초대형 군수공장 일본육군조병창을 개소했다.
부평은 서울과 인천항의 중간 지점이었고 경인철도가 지나 물자 수송에 유리했다. 이 지역은 분지인 데다 안개가 많았다.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본이 조병창 건설지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
패망후 자료 불태워… 규모 미확인
인근 미쓰비시 줄사택 등 일부 남아
국립민속박물관이 2018년 펴낸 조사보고서 '부평에 새긴 노동의 시간'을 보면 조병창의 월간 생산 목표는 소총 2만정, 경기관총 100정, 중기관총 100정, 총검 2만정, 군도 1천개였다. 조병창 인근에 들어선 일본의 중공업 공장은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를 비롯해 20개에 달한다.
논밭이었던 부평 지역은 순식간에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조병창과 주변 하청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상당수가 강제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종 문헌을 보면 인천에서만 2만4천여 명이 강제 동원됐는데, 성인 남성은 물론 학생과 어린 여성까지 끌려갔다. 부평공원(조병창 터)에 세워진 '징용노동자상'의 소녀는 실제 이야기다.
한국전쟁 직후로 추정되는 애스컴 시티 항공 사진. 사진 아래쪽 굴뚝이 2개 있는 건물은 일본육군조병창 때 제련소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이 건물은 현재 캠프 마켓에 남아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
인천시립박물관이 보유한 중국 송·원·명대 철제 범종 3개는 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석남 이경성(1919~2009) 선생이 해방 직후 조병창에서 수습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전쟁이 장기화하자 바다 건너 중국에서 공출한 물자까지 조병창에 투입했다. 일본이 각지에서 공출한 쇠붙이를 녹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련소 건물이 아직 캠프 마켓에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조병창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이 남지 않았다. 일본 육군이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한 직후 관련 서류나 장부 등을 모두 불태워 기록물 대부분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규모 기지로 발전
술집·미용실 등 지역경제 한축으로
조병창의 흔적은 미군이 계속 사용했던 캠프 마켓 내부의 몇몇 건물들, 미쓰비시 줄사택 같은 당시 노동자들의 주택, 토굴과 땅굴 정도다. 조병창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미쓰비시 공장이 있던 부평2동 동수역 일대를 일컫는 '삼릉'(三菱·미쓰비시)처럼 여전히 일상 깊숙이 상흔으로 각인돼 있다.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8일 인천항으로 한반도에 상륙해 부평 일본육군조병창을 접수했다. 미군은 조병창 자리에 '애스컴'(ASCOM)이라 불린 제24군단 예하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를 주둔시켰다. 남한으로 들어오는 미군 물자를 총괄하는 군수보급기지였다. 애스컴 인근에는 남한 최초의 기지촌이 형성됐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설정해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이듬해 6월 한국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애스컴에 잠시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전후로 애스컴에도 폭격을 가했다. 휴전 직전 캠프 마켓 옆(현 부영공원)에는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부평 포로수용소에서는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사건 때 미군의 총격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애스컴은 본격적으로 확장해 '애스컴 시티'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 미군기지를 꾸렸다. 부평 미군기지에는 보급창,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단위 부대 수십 개가 주둔했다. 캠프 마켓은 '캠프 하이예스' '캠프 그란트' '캠프 타일러' '캠프 아담스' '캠프 해리슨' 같은 부평에 있는 수많은 단위 부대 중 하나였다.
캠프 마켓 인근 부영공원(일본육군조병창 터)에 2017년 세워진 징용노동자상. 인천의 징용노동자상은 다른 지역과 달리 조병창에 강제 동원된 소녀도 있다. /경인일보 DB |
당시 부평 미군기지 범위는 현재 북쪽의 한국지엠 부평공장 일부부터 남쪽의 부평서중학교까지, 서쪽의 3보급단 부근에서 동쪽의 부평동초등학교, 뒤편의 백조주상복합아파트 주변까지 아울렀다. 인천의 미군기지는 부평뿐 아니라 주요 도심을 거쳐 월미도와 인천항까지 곳곳에 주둔해 하나의 벨트를 이뤘다.
부평 미군기지 주변으로 기지촌도 커졌다. 술집과 클럽, 미용실, 세탁소 등이 영업하면서 인천 경제의 한 축이 됐다. 부평 신촌(부평3동 일대)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는데, 미군 병사가 출입하는 클럽이 한때 2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미군 병사들의 유흥과 향락을 목적으로 생겨난 기지촌에서 벌어지는 미군 상대 성매매를 묵인했다.
부평 미군기지에서 근무한 한국인 노무자는 한때 3천여 명에 달했으며,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물자는 동인천 양키시장 등지에서 팔렸다.
다층적 맥락 세계유산 올릴 가치
향후 활용방안 역사성 고려 필요
애스컴은 1969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단계적으로 부평에서 철수했다. 국방부가 애스컴이 나간 땅을 대기업 건설사들에 매각했고, 1985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캠프 마켓 인근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캠프 마켓 내 주한미군에 빵을 공급하는 제빵 공장이 최근까지 가동되다 내부 시설이 철거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사기지와 군수공장이 결합한 형태로, 주한미군이 주둔할 때는 군수보급기지로 쓰인 캠프 마켓은 노동 역사 현장이자 미군기지 주변을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깃들어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층적 역사 맥락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올릴 가치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으로 인천시가 캠프 마켓의 활용 방안을 수립할 때 반드시 역사성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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