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의현(당시 30세)씨의 어머니 김호경씨가 참사 2주 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누나 혜인씨가 호주로 떠나면서 남긴 사진은 마지막 가족사진이 됐다. 호경씨가 왼쪽 중지손가락에 낀 은반지는 의현씨의 유품이다. 2023.10.26 /목은수기자 wood@kyeongin.com |
"가을이 예쁘게 물드는데, 너만 없구나."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둔 지난 26일 오후 수원시 영통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유가족 김호경씨는 참사 이후 평온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참사로 숨진 고(故) 김의현(당시 30세)씨의 어머니 김호경씨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다녀올게"라는 말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아들 마지막 남긴 말 "다녀올게"
평소처럼 새벽엔 올 줄 알았는데…
주중에 매일 찾는 서울 분향소
얘기할 수 있어 치유 되는 공간
작년 이후 일상 송두리째 달라져
평소처럼 새벽엔 올 줄 알았는데…
주중에 매일 찾는 서울 분향소
얘기할 수 있어 치유 되는 공간
작년 이후 일상 송두리째 달라져
아들이 생전에 끼던 반지를 바라보던 그는 "방사선사였던 아들은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1주일에 6일을 일했다. 휴일에는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즐겼다. 그날도 다녀오겠다고 말해 새벽에는 올 줄 알았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울먹였다.
작년 아들의 죽음 이후 송두리째 변한 그의 일상에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참사 당일 새벽 4시 무렵, 아들의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아들이 사고를 당한 것 같다고 했다"며 "친척들과 뉴스를 보며 밤을 꼬박 새운 오전 11시께 사망자 유가족에게 모두 연락이 갔다는 자막이 나왔고,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안심했었다. 그러나 1시간 뒤 실종자 안내 번호로 연락했는데 아들은 일산 동국대병원에 있었다. 정부에서 연락이 온 건 아들 친구들을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하고 16시간 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가족에게 분향소는 역설적이게도 치유의 공간이었다. 자식 얘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김호경씨의 핸드폰에 달린 보라리본.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
그는 아들이 녹사평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뿐더러 그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나 서울시청에 분향소가 차려질 무렵, 그는 문득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약만 먹으며 누워있는 삶을 견딜 수 없었고, 겨우내 분향소를 지킨 다른 유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들의 방을 보며 "다녀올게"라고 말하고 주중에는 매일 아주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시청으로 향한다. 분향소는 역설적이게도 치유의 공간이었다. 자식 얘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면서 "경찰은 영안실에 있는 아들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었다. 그때 아들의 손이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한이 된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서 책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남겨진 이들의 삶은 송두리째 변했다. 이제 아들은 그에게 기억으로 남았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서 책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남겨진 이들의 삶은 송두리째 변했다. 이제 아들은 그에게 기억으로 남았다. 아들이 했던 말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참사 1주일 전, 아들이 "엄마 내가 결혼하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었다.
'그동안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하더니, 천천히 준비하려고 했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또 경리팀장으로 정년퇴직을 한 뒤 간호조무사를 준비하던 그에게 아들은 "엄마, 그거 몸으로 하는 일이라 사무실에서만 일했던 사람은 힘들어 못 해"라고 말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출근날이던 지난해 11월 1일은 아들의 발인 날이 됐다. 그는 "엄마 일 못 하게 하려고 그날 간 것 같다"고 말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목은수기자 woo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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