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 나의 작은 의자

입력 2024-01-25 19:44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1-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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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외가댁이 팔린다고 하였다. 주인이 바뀌기 전에 집과 이별의 예식을 치르는 것이 예의일 듯싶어 모친과 함께 귀향을 하였다.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는 너른 마당엔 들풀이 우거져서 주인을 잃은 집을 더 을씨년스럽게 하였다. 마당귀 한쪽의 농기구를 보관하던 헛간은 곧 무너질 징후가 가득했다. 길차게 뻗어오른 잡풀을 헤치고 헛간으로 들어간 어머니에게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신음은 어려서부터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머니 특유의 울음이 섞인 기쁨의 신호음이었다.

헛간에서 나온 어머니의 손엔 작은 의자가 들려 있었다. 마치 의자가 잃어버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하였다. 한여름 해변 파출소에서 손을 놓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고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끝에 만난 어머니와의 재회는 이산가족의 상봉과 같은 감격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의자는 의자로서의 용도를 잃어버린 유아용 의자였다. 농기구들과 온갖 잡동사니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의자는 거미줄을 걷고 먼지를 쓸어내자 반백년 망각을 통과한 자의 위의를 드러냈다. 그 낡은 의자는 아버지가 직접 못질을 하고 사포질을 한 의자였다. 어머니는 그날의 일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톱질을 하는 사위에게 외할머니께서 내온 음식이 수박이었다는 것과 공구함을 든 막내 외삼촌이 그 곁을 조수처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려주며 새록새록 살아나는 기억에 새삼 경이로워 하고 있었다.

의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 나뭇결은 아버지의 지문이었고, 못은 아버지의 손에 박혀 있던 굳은살이었다. 마땅한 놀이기구가 없을 때면 나는 그 위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를 내며 용을 무찌르는 중세의 기사가 되곤 하였다. 어느 날은 돈키호테의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격하였다. 충실한 부하로서 늘 곁을 지키길 게을리하지 않던 강아지 누렁이가 틀림없이 산초 판자의 역을 맡았으리라. 갸우뚱한 얼굴로 모험을 함께한 헛간의 쇠스랑과 호미와 빗자루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올 법한 판타지의 벗들로 바뀌었다.

나는 그들에게 즐겨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짓는 놀이는 적적한 시간을 달래기에 참으로 안성맞춤인 놀이였다. 쇠스랑을 빗으로, 호미를 할머니로, 빗자루를 효자손으로 새로 명명해주고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즐거움과 함께 나는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의자에게도 물론 이름이 있었다. 남동생이 있었으면 했던 내게 의자는 어머니가 유산을 한 아이였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보리'라고 지어주었다. 왜 보리였을까. 기억엔 없으나 외가에서 짓던 보리밭과 보리피리를 불어주던 외삼촌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하염없이 불어가는 보리밭가에 서서 신작로 너머로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던 저물녘의 풍경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름을 갖게 된 사물들은 함부로 할 수 없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2탄 '거울나라의 엘리스'에서 붉은여왕의 식탁에 초대된 엘리스에게 양고기가 나오자 여왕이 말한다. "쑥스러워 말아요. 이쪽은 양고기에요. 양고기야, 이쪽은 엘리스란다." 그러고 나서 엘리스가 평소의 습관대로 양고기를 자르려 하자 여왕은 격노하며 급하게 소리친다. "안돼요! 소개받은 상대를 자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그렇다.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의 구별엔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이 있다. 사물화된 비인간만이 실용성을 토대로 소비된다. 물건으로 분류된 동물은 결코 의인화되지 않으며, 얼굴과 이름이 없는 모습으로 상징 세계에 등장한다. 요컨대, 의인화되는 비인간은 먹을 수 없는 대상이다. 물건이나 기호가 아니다. 비인간을 소비대상으로 대할 때 사람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함부로 자를 수 없는 소개받은 상대로 환대하는 것이 얼굴을 지닌 명명의 세계라고 하겠다.

보리는 그렇게 다시 왔다. 아버지도 외할머니도 가신 뒤의 일이었다. 의자는 남아 그들의 삶을 추억한다. 지친 하루 현관문을 열면 보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반백년 전의 그 소년처럼.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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