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50대 여성, 사람 '정순'… '엄마'나 '딸'이 아니다, 독립된 개체일 뿐이지

입력 2024-06-02 18:49 수정 2024-06-02 18:50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6-03 15면
성범죄 피해자 '정순' 통해 권력 상관관계 다뤄
모녀, 수직적 관계서 수평적으로 유일한 탈바꿈
중요한 건 본인만의 속도라는 걸 성찰케 하기도


영화 '정순'2
영화 '정순' 스틸컷. /(주)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50대 여성, 정순(김금순)이 반찬을 그릇에 담다 말고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 "엄마, 엄마…." 엄마가 '엄마'를 외치며 우는 모습을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이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그런 유진에게 정순이 소리친다. "내 일인데 왜 자꾸 네 맘대로 해."

엄마와 딸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서였을까. 엄마를 대신해 동영상을 유포한 가해자들을 하루빨리 처벌할 방법을 두고 전전긍긍하던 유진은 멈칫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를 향한 선한 의도가 뒤틀렸다는 걸 깨달은 순간, 관객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다는 듯한 유진의 표정을 마주한다. 영화 '정순'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여성 그리고 중년. 영화 '정순'의 줄거리를 사건의 인과관계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세 가지로 손쉽게 요약할 수 있다. 서로 배우자가 없는 정순과 영수(조현우)는 동네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동료였다가 연인으로 발전한다. 여느 커플처럼 만남을 이어가던 중 속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정순의 모습을 영수가 휴대폰으로 촬영한다.

어느 날 영수는 이 영상을 공장의 젊은 남자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영상이 공유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유진은 엄마를 대신해 경찰서로 향한다. 사건 접수 담당 경찰은 유진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피해자는 젊은 여성 유진이 아닌, 그의 엄마였기 때문.

중년 여성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인 경우는 영화 밖 현실에서도 좀처럼 조명되지 않던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영상이 공유되는 과정은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가장 자극적인 부분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정순의 '피해자다움'을 애써 증명하려는 장면도 없다. 영화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들이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주목할만한 부분은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영화는 정순과 주변인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권력'의 상관관계를 아주 세심하게 다층적으로 쌓아간다. 딸과 엄마, 연인 관계인 남자와 여자, 남성성과 탈남성성, 중간 관리자와 노동자를 등장시켜 '수직적 관계'라는 공통분모로 엮었다.

영화는 이 무수한 관계에 담긴 부조리함이 자아내는 폭력성을 들춘다.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갑과 을의 관계는 문제의 영상이 촬영된 시작점이다. 공장의 건장한 젊은 남자 무리에게 "허리 건강 관리나 잘하라"며 하대당하는 영수는 연인의 영상을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는 제물로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정순의 아들뻘인 공장 중간 관리자는 정순을 부품 취급하기 일쑤다.

이중 유진과 정순, 두 모녀관계에는 갈등을 맞닥뜨린 뒤 '수평적인 관계'로 탈바꿈하는 성장 서사가 유일하게 담겨있다. 이는 남성성과 탈남성성 등 나머지 관계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찰적인 행동에 가깝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유진이 마주한 건 엄마는 보호할 대상이 아닌, 그저 '50대 여성 김정순'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디지털 성범죄로 일상이 무너진 정순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건 정순 그 자신이다. 유진은 엄마가 아닌, 50대 여성 김정순을 위해 김정순만의 속도에 맞춰 보폭을 하나둘 맞춰 나간다.

영화 '정순'22
지난달 29일 수원시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 영화 '정순' 관객과의 대화(GV)를 마치고 정지혜 평론가(맨 왼쪽), 정지혜 감독(가운데), 윤금선아 배우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4.5.29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지난달 29일 수원시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 영화 '정순'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지혜 감독은 "모녀관계는 엄마와 나, 그 사이에서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엄마도 하나의 독립된 사람이고, 나도 독립된 사람이고, 우리가 비슷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는 점이 모녀관계에서 부딪치는 형태로 나타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인물과 플롯이 빚어낸 순간들이 영화 곳곳에서 빛을 낸다. 정순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를 치유하는 희망의 실낱은 수직적이었던 관계가 무너지고 마침내 재정립된 정순과 유진의 모녀관계에서 뻗어났다. 그리고 다시 일상을 찾아가는 정순의 첫걸음은 다름 아닌 운전 면허증을 따는 것이었다.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자신만의 속도로 질주하는 정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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