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추상주의 거장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展
佛 CCC OD 컬렉션·유족 소장 70여점
회화 대표작과 초기 조각·영상도 공개
나치의 잔혹함·여행서 느낀 감각 표현
10월 20일까지 수원시립미술관서 전시
'풀밭 위의 소녀(1940)'. |
"(그의 회화에서) 빛은 더 이상 물질이 아닌 투명성으로 표현된다. … 감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올리비에 드브레는 해외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는 프랑스의 인기 화가 중 한 명이다."
20세기 서정적 추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올리비에 드브레(1920~1999).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리디아 아람부르크는 이같이 드브레를 회고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올리비에 드브레라는 이름은 다소 낯설다. 몇몇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파편적으로만 소장하고 있을 뿐, 미술사적으로 조명하는 시도는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그의 개인전이 미국, 영국, 노르웨이, 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 열린 것과는 대비된다.
드디어 국내에서도 프랑스 추상주의의 거장 드브레의 작품을 총망라해 감상할 기회가 찾아왔다. 수원시립미술관이 수원시의 자매도시인 프랑스 투르시 소재 드브레 현대창작센터(CCC OD)와 협력하면서다.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에서는 CCC OD가 소유한 컬렉션 외에도 작가 유족의 개인 소장품 등 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회화 대표작은 물론, 초기작과 조각·영상 등까지 드브레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회고전 성격을 띤다. 동시에 작품 배치와 관람 동선을 섬세하게 구성하며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중 드브레의 주요 일대기와 전시실에서 눈여겨 볼만한 작품을 추려봤다.
■ 세계 2차 대전의 비극… '추상주의'로 향한 시선
드브레의 초창기 작품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마주한 고뇌가 담겨있다. 특히 지난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점령과 이후 벌어진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은 1940년대 중반까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사건이다.
친형인 미셸 드브레(샤를 드골 정부 초대 총리)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이후 그도 합류하며 프랑스 해방 운동에 나섰다. 부상을 입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저항 활동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브레의 화풍도 차츰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해간다. 이 시기 성사된 파블로 피카소와의 교류도 작품 세계를 무르익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는 현상을 단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정을 '기호'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화폭에 그려낸다. 1부 '만남, 추상으로'에서는 이런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나치의 사악한 미소(1946)'. |
'나치의 사악한 미소(1946)'는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작품으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새로운 시각적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드브레는 검은색, 각진 형태, 날카로운 선을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나치의 잔혹함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발한다.
'기호 음악가(1948)'. |
이어지는 '기호 음악가(1948)', '기호 인물(1950)' 등 기호 시리즈는 앞선 추상주의가 한층 더 깊어지는 변곡점에 해당하는 작품들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기호 인물(1950)'. |
■ 겹겹이 쌓아올린 색감의 향연… '투명한 서정성'
드브레의 작품을 대표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색채'다. 나치가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온 1950년대 이후 드브레는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새로운 풍경과 빛을 찾아다니며 색상을 얇게 쌓아 투명하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앞서 1940년대 피카소와의 만남이 추상주의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1950년대 후반 미국을 여행하며 만난 마크 로스코와의 교감은 색채 활용의 범위를 넓히는 밑거름이 됐다.
2부 '심상 풍경의 구축'과 3부 '여행의 프리즘'에서는 각각 이전보다 화려해진 색감의 대형 작품과 세계 곳곳의 여행지에서 느낀 감상을 나타낸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미국 색면회화와 달리, 드브레의 작품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서 감각을 추출해 색으로 재현한 점이 특징이다.
'거대한 엷은 검정(1962 추정)'은 드브레의 풍경 연작 중 하나로, 이 시기부터 작품 제목에 색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며 주요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노르웨이 여행을 다녀온 뒤 그린 '겨울 슬레탈렌의 흰색1·2(1988)'는 흰색 유화 물감의 색과 질감을 다양하게 활용해 작가가 마주한 북유럽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거대한 엷은 검정(1962 추정)'. |
■ '루아르의 방'… 작품 주제 극대화한 공간 구성
'기호와 추상주의', '색채와 서정성'. 드브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섬세한 전시실 활용과 맞물려 그 주제의식이 더욱 도드라진다.
제2 전시실에 자리한 '루아르의 방'은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드브레가 생전 가장 사랑했던 장소, 프랑스 투렌 지방의 루아르 강을 그린 대형 작품 세 개를 천장에 매달아 놨다.
그리고선 전체적으로 조도를 낮추고 세 작품에다만 조명을 비췄다. 한층 한층 덧발라진 캔버스 속 묽은 색채는 조명과 만나 마치 강물이 흐르는 듯 여러 개의 투명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현진 수원시립미술관 학예사는 "올리비에 드브레의 대형 작품들이 한국에서 소개된 적이 없었기에 전성기 작품들은 (온전하게 보이도록) '화이트 큐브(흰 벽을 사용한 전시 방식)'로 배치했다"면서도 "루아르의 방은 높은 천고를 활용한 케이스다. 조도를 낮추고 작품에만 조명을 비추니 겉에 있는 색상 뒤에 가려져 있던 톤들이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순달스피오르 아침의 파랑(노르웨이)(1971)'. |
회화 외에도 투렌에 있는 드브레의 아틀리에를 재현한 공간, 베이징·일본·미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할 때 작업하던 사진, 아들 파트리스 드브레 교수를 인터뷰한 영상 등도 전시실에서 함께 살필 수 있다.
전시실 내 마지막 공간에서는 드브레가 현대 무용가 캐롤린 칼슨과 협업한 공연 '사인(1997)'의 실황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해당 작품은 캐롤린 칼슨이 드브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공연으로, 드브레는 무대 미술과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
세실 로겔 CCC OD 부관장은 "이번 기획전에서는 CCC OD에서도 볼 수 없는 드브레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데다, 굉장히 세련된 방식으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며 "드브레의 커리어 중 전성기를 잘 반영하는 등 작가에게 바치는 헌정 같은 전시회"라고 평가했다. 전시는 오는 10월20일까지.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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