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의 만화세상

[박인하의 만화세상] 우리를 만든 건 첫사랑의 힘

다니구치 지로 ‘겨울동물원’, 세미콜론,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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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갑자기 추워졌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리가 내린다. 채 걷지 못했던 고추는 붉은 열매만을 남기고 말라붙었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려는 마음으로 아꼈던 다니구치 지로의 ‘겨울동물원’을 보았다. 이 겨울에 어울리는 만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돗토리에서 교토로 이주해 직장을 다니던 주인공 하마구치 미쓰오는 의도치않게 사장 딸의 사랑의 도피를 돕게 된다. 도쿄에서 신문배달하며 야간 디자인학교에 다니는 친구 다무라에게 난처한 상황을 털어놓았더니, 상경해 인기 만화 곤도 선생의 화실에서 일하기를 권한다. 도쿄에 온 첫날부터 곤도 선생의 마감에 동참하게 된 하마구치. 그렇게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다니구치 지로가 등장하는 자전만화는 아니지만, 자전만화로 읽힌다. 다니구치 지로도 돗토리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교토의 섬유회사에서 근무하다, 도쿄로 상경해 잡지 ‘만화소년’ 등에 만화를 연재한 이시카와 큐타(石川球太)의 어시스턴트로 만화계에 발을 딛는다.

‘겨울동물원’은 중의적 제목인데, 동물원은 주인공 하마구치가 즐겨 찾으며 동물을 그리던 곳이고, 교토 섬유회사 사장의 딸이 유부남 연인을 따라 도망간 곳이며, 마지막으로 아픈 연인과 데이트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사랑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물을 즐겨 그렸던 건 분명하다. ‘겨울동물원’의 주인공 하마구치와 작가 다니구치의 삶의 여정의 큰 줄기는 동일하다. 디테일도 대부분 경험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후반 새로운 만화를 내세운 잡지 ‘가로’와 ‘COM’이 등장하고, 쯔게 요시하루의 ‘나사식(ねじ式)’을 보며 충격을 받은 만화가들의 분위기와 매주 정신없이 마감을 하는 주간소년잡지의 풍경도 생생하다. 일본의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하던 시대의 풍경도 얼핏 보여준다. 가부키초 뒷골목 지하의 스낵바에 모인 이들은 혁명의 노래를 부른다. “찢어라! 부숴라! 혁명전사!” 힘이 넘치는 60년대 후반 일본만화의 풍경을 만나는 것도 흥미롭지만,‘겨울동물원’의 진짜 재미는 첫 사랑의 풋풋한 이야기다. 하마구치는 지인의 부탁으로 도쿄에 요양온 마리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된다. 마리와 데이트를 통해 그동안 구상만 하던 만화를 완성하게 된다. 첫사랑의 떨리는 감성으로 완성한 만화는 데뷔작이 된다. 요양 온 소녀와 데이트, 그리고 건강이 안좋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소녀와 그 소녀를 잊지 못하는 소년.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다니구치 지로는 시대와 공간과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넣어 생생하게 만들었다. 특히 갑자기 고향으로 떠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원고를 보여주고 싶어 몰입하는 하마구치의 모습 위로 깔리는 1인칭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하마구치가 된 듯 몰입감이 뛰어나다. 마침내 원고를 완성하고 그녀의 언니에게 부탁해 원고를 그녀에게 보낸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녀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과 이야기를 만드는 기쁨을.” / 소년은 기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병원을 찾아 야윈, 하지만 여전히 예쁜 소녀를 만난다. 소년은 마음을 쉬 전하지 못한다. 소년은 소녀를 끌어안고 말한다. / “좋아해!”

‘겨울동물원’의 띠지에 ‘거장 다니구치 지로를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고 써있다. 어디 다니구지 지로 뿐이랴.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이 겨울에 그 사랑을 추억해 보자.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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