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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스토리] 정리의궤로 돌아본 국외 반출문화재 대책

'기회'마저 잃어버릴 뻔한 문화재 되찾기
정리의궤 장안문
정리의궤와 기존 화성성역의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채색'이다. 목판으로 인쇄된 화성성역의궤(1801) 속의 그림은 훈련도감 소속 마병(馬兵)이었던 엄치욱의 작품인데, 정리의궤는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직접 손으로 그린 작품이어서 그 수준이 훨씬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수원의 4대 문인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의 모습(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프랑스국립도서관 제공

민간·학계 수년간 존재가능성 주장 불구
정부 "타 유물 회수 악영향" 미온적 대처
소유국가·기관 협조 없인 실태조사 못해
예산부족 경매시장 국보급나와도 손못써


프랑스로 넘어간 지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정리의궤(整理儀軌)는 왜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을까. 정부는 지난 1960년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국외 소재 문화재에 대한 추적조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정리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정리의궤의 경우 BNF가 지난해 6월부터 의궤 원본을 PDF 파일로 올려 누구나 볼 수 있게 도서관 홈페이지(www.bnf.fr)에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주무부서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하 문화재재단), 국립중앙박물관 등 문화재를 다루는 어떠한 부서도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국외 문화재 추적 시스템 자체에 빈틈이 많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반출 문화재 조사하는 전담기관 설립했지만 역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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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문화재재단 등에 따르면 정부는 광복 이후 15년만인 1960년께 문교부 산하에 문화재관리국을 두고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추적해왔다. 그러다 1992년에는 문화재청 산하에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창설해 본격적 조사를 시작했고, 지난 2012년에는 반출 문화재 조사를 전담으로 하는 재단을 창립했다.

이들 기관이 진행한 반출 문화재 조사는 대부분 공문을 통해 시작된다. 우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관·단체·개인에게 공문을 보내 실태조사를 허용해 달라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해당 기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조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로 정리의궤에 대한 실마리가 파악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문화재재단 측의 설명이다.

반출 문화재 추적 주체기관이 수차례 바뀐 탓에 우리 정부가 BNF에 실태조사를 허용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국내 기관의 조사역량이 반출 문화재 보유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과 미국에 집중돼 있다는 점과, 그간의 조사정보를 정리한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외한국문화재 자료정보관'에 정리의궤와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BNF에 대한 실태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부가 정리의궤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정리의궤를 소장하고 있는 BNF는 지난 2011년 반환 형식을 놓고 프랑스 정부와 꾸준한 협상을 벌였던 '외규장각 의궤'를 보관하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외규장각 의궤는 지난 197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박병선 박사가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시절, 베르사유 분관에 폐지로 잠자고 있던 것을 발견해 총 297권의 존재가 파악됐다. 그러나 박 박사는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 정부에 알렸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는 등 프랑스 정부로부터 방해를 받아 충분한 조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 받지 못했다.

만약 프랑스와 의궤 환수협정을 진행하면서 충분한 실태조사에 대한 내용을 협의 했다면, 정리의궤를 비롯해 숨어있는 문화재가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표 참조

이에 대해 문화재재단 관계자는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양국협상 당시 문화재 환수뿐만 아니라 떼제베(TGV) 등 외교·경제적 요소가 추가로 언급되면서 외규장각 의궤 외에 다른 문화재 실태조사는 협상에서 제외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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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의 네 개 각루 중 '동북각루(東北角樓)'의 모습. 일반인들에게는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으로 알려져 있다(사진 왼쪽), 영화정도. 1795년(정조 19) 5월 정조의 명으로 인공저수지인 만석거(萬石渠)가 축조되었고, 같은 해 9월 만석거 남서쪽 언덕에 영화정이 건립됐다. 정조가 이듬해 봄 이곳에 들렀을 때 '꽃을 맞는다'는 의미의 '영화정(迎華亭)'이라는 편액을 걸게 했다.

#민간단체는 '정리의궤'의 존재를 예측했었다

이처럼 정부기관이 정리의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 오히려 민간 조사단체와 학계에서는 정리의궤의 존재 가능성을 수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해왔다.

기존에 발견된 의궤와 달리 전체 내용을 어람용으로 정리한 별도의 의궤가 있다는 학술적 분석과,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 추론까지 나왔지만, 정부는 민간단체의 주장을 조사에 반영하지 않았다. 민간단체의 전문성과 역할을 인정해 일정 규모 이상의 단체에 대해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이 배경에는 문화재 환수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시각차에 따른 갈등이 기저에 깔려 있다. 정부는 특정 문화재를 놓고 그에 대한 환수를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민간의 의견이 외교관계를 그르쳐 다른 문화재 환수에 악영향을 주는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민간은 정부가 지나치게 미온적인 대처만을 반복해 환수 가능성 자체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강경하게 맞서고 있다.

문화재찾기 한민족네트워크 관계자는 "사실관계만 따져봐도 외규장각 의궤, 정리의궤 모두 민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존재조차 알 수 없었을 문화재"라며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찾는 일인데 미온적 태도로만 일관할 게 아니라 때론 공격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성토했다.

한편 조사 대상 선정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도 문제다. 문화재재단은 반출 문화재를 1천 점 이상 보유한 기관을 우선적으로 순차 조사한다는 방침인데, 해당기관에서 협조공문을 반려했을 경우 특별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협조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국가로 문화재 조사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또 온라인을 활용한 조사 역시 경매시장에 등장하는 문화재를 추적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BNF가 1년 전에 공개한 정리의궤 PDF 파일을 확인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문화재 환수에 투입된 인력과 예산으로는 알려진 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것도 벅차다는 해명이다.

실제로 지난해 문화재 환수에 투입된 정부 예산은 21억5천만원 남짓에 불과하다. 국외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문헌조사에 드는 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경매 시장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발견하더라도 매입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지난해 스위스 경매를 통해 환수한 '범어사 칠성도' 역시 원소장자인 범어사 측이 확보한 자금으로 매입한 것이다.

문화재재단이 핵심사업으로 삼고 있는 실태조사 부분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현재 국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 16만4천454점의 문화재 중 실태조사를 마친 것은 전체의 28%인 4만7천여 점에 불과하다.

주어진 인원과 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는 실태조사의 한계량은 1년에 5천 점 남짓인데, 산술적으로 앞으로 22년은 더 조사해야 현재 파악된 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가 끝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정리의궤같이 아직 파악되지 않은 문화재가 정규조사를 통해 발견되길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이런 상황인데도 문화재재단은 2012년 출범 이후 '전담기관'이라는 이유로 문화재 환수에 관한 업무를 모두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재청은 재단 출범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복원과 보존 연구기능으로 돌렸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 문화재에 대한 관리를 담당할 뿐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담기관을 만들어 관련 전문가를 한데 모으는 것은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조치로, 실제 재단 출범 이후 문화재 환수 실적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며 "재단이 문화재청 소속으로 만들어진 기관인 만큼 예산과 인력 모든 면에서 공조체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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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정약용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기 위해 만든 거중기(擧重機),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사용한 수레의 일종인 유형거(遊衡車).

#문화재 돌려 받아도 제대로 활용 못해

어려운 과정을 거쳐 환수된 문화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환수한 문화재는 총 67건 4천682점이며 이중 정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4건, 167점에 불과했다.

이뿐 아니라 국립민속박물관은 소장 환수 문화재의 2.3%만을 전시하고 있었고, 국립고궁박물관은 8.2%에 불과했다. 회수된 문화재가 정작 국내에서 외면받을 경우 앞으로 다른 국가와의 환수협정 과정에서 '문화재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행 시스템대로라면 문화재 환수는 문화재가 소실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문화재재단 관계자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문화재 조사와 환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민간 전문가들과의 소통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지원금을 통해 실사를 권장하겠다. 온라인 등 문화재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에 대해서도 좀 더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해명했다.

이어 "이번에 발견된 정리의궤는 재단 차원에서의 실태조사를 추진해 해당 문화재의 이동 경로와 환수 가능성, 지정문화재 등재 가능성에 대해 꼼꼼히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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