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일컬어지는 이 회장님은 평소 신용과 검소, 성실의 3대 덕목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성공한 기업가로서도 신용과 기업윤리를 특히 강조하신 분이다. 기개와 강단이 있으면서도 소탈하고 호방한 성품에 누구에게나 깊은 사랑을 실천하신 따뜻한 분이었다.
인간으로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 기업가로서 장학사업을 시작한 선구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인이 설립한 송암장학회와 회림육영재단은 기업의 장학사업 이외에도 학술 문화부문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사업 등을 통해 기업가 정신을 확산시킨 위인으로 기록될 만하다. 1977년도에 군산의 청구목재를 운영할 때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개설한 청구여중은 우리나라 산업체 부설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인천과는 더 특별히 인연이 깊다. 1960년대 불모지였던 국내의 화학산업을 개척했던 동양화학을 인천에 설립하였다. 인천 송도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송도학원 이사장으로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은 개성의 송도보통학교였는데 1952년 전쟁으로 인해 인천으로 피난, 개교를 하였다. 이 회장님은 바로 그 개성의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모교사랑이 어찌 깊지 않았으랴. 학교 운영은 물론 교사신축과 장학, 복지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송도고등학교는 오늘날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송암미술관을 건립하여 본인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 8천400여점과 미술관 일체를 인천시에 기증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범 김구선생의 동상을 인천대공원에 건립해준 고마운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여 자립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1981년도에 인천상공회의소 10대 회장을 맡으면서 남동공단 조성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성사시킨 분이다. 현재 남동공단이 6천500여 기업들이 입주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국가산업단지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는 이 회장님의 남다른 혜안과 인천사랑의 마음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 후 11대 회장까지 연임하면서 인천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필자와의 인연은 일천하다. 60년대 중반 필자는 팔팔한 기자였고 동양화학은 학익동에 막 둥지를 틀 무렵이어서 이 회장님은 취재원 정도였다. 아버님을 이어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바 있는 장남인 이수영 회장과는 구청장 시절 가끔 만난 인연이 있기는 하다.
지금 동양화학 부지는 도시개발을 위한 준비로 부산하다. 한편으로는 세금소송이 진행중이고 폐석회 문제도 시끄럽다. 고인이 인천을 위해 헌신해 주신 일을 떠올리며 그 숭고한 정신을 쫓아 잘 해결이 되었으면 한다. 이 회장님이 생전에 인천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시민들이 오래도록 이분을 기억하고 해마다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원철 (사)인천연수원로모임이사장·前 인천 연수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