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
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

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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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

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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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


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

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

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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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

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

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

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

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

<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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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

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

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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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

인천문화재단 CI
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