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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추기경은 모교 100주년 행사 미술전시회를 준비 중인 후배로부터 '자화상' 한점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검정 유성 파스텔로 쓱쓱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 밑에 '바보야'라고 적었다. 이 그림이 다음 날 일간지 1면에 실리자 큰 반향이 일었다. 너무도 단순해 무심하기까지 한 그림에서 많은 사람이 '바보처럼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기자가 왜 '바보야'라고 썼는지 묻자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 신부'로 불러주길 진심으로 바라던 추기경은 그러나, 불의(不義)에 대해선 단호했다. 1980년 정월 전두환이 새해 인사차 추기경을 찾아오자 면전에서 12· 12사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 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추기경은 원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했지만, 감히 읊어 볼 생각을 하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하늘을 우러러 너무 부끄러운 게 많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시를 '별 헤는 밤'으로 바꿨다.

추기경은 2004년 4월 '21세기의 지도자상'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었다. 이날 추기경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을 새 시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추기경은 또 "누군가가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라며 이 기적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이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16일은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한 지 10주년 되는 날이다. 지금 주위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존경할 만한 어른' '의지하고 싶은 원로'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어른들이 모두 이념에 흔들리고, 정파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감옥에 있고, 끝이 없는 적폐청산으로 국론이 갈기갈기 찢겨 사랑조차 없는 지금, 바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너무도 그립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