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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과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정말 여전해" 이건 무슨 소리람?
지금도 난 골뱅이소면 비비지 않아
매일 강남까지 출근시켰다니…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에 웃음꽃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15년도 지난 일이다. 그러니 가물가물한 것이 당연한가? 나는 어렸고 자신만만했으며 낙천적이고 또 예의발랐다. 아마도 겁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아한 취미를 가진 여자가 되고 싶어서 예쁜 접시를 모으는 여자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접시를 사봐야 수납장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일 뿐 내 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그 접시들을 볼 일도, 나조차도 그걸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시시했다. 방향을 바꾸었다. 목공소에 전화를 걸었고 머그잔 진열장을 주문했다. 접시야 수납장 신세지만 머그잔 정도라면 손님들 보기 예쁘라고 거실 한편에 쭉 진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달에 한 개씩 예쁜 머그잔을 골랐다. 내 삼십대 초반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얼마 전, 15년도 전에 만났던 옛 애인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제 나이를 먹어 불편할 것도 없이, 무람없이 어깨를 치며 인사했다. 생맥주가 날라졌고 치킨과 골뱅이소면이 테이블마다 놓였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골뱅이무침과 국수를 비비다가 나를 보았다.

"여전해. 정말 여전해." 내가 물었다. "뭐가?", "내가 열 번을 비비면 네가 한 번은 비벼야지. 정말 한 번을 안 비벼. 맨날 옆에서 웃고만 있어.", "내가?" 나는 까르르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예의바른 사람이란 말야. 그랬을 리 없어.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말한다. "말도 마. 기억나? 아침마다 일산에서 강남까지 너 출근시키느라 나는 매일 지각한 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광화문에 살던 15년 전의 나는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 김치냉장고와 도마 살균기가 딸린 오피스텔이 퍽 마음에 들었고 길쭉한 아일랜드 식탁 앞에 빨갛고 검은 긴 다리 의자를 들여놓으며 혼자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곧 일이 닥쳤다. 강남역에 위치한 회사로 옮기게 된 것이었다. 강남역이라니. 꼬박꼬박 왕복 네 시간씩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게 된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었고 나는 매일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고 말았다. 가끔, 아주 가끔 그가 출근길에 나를 태워 합정역에다 몇 번 떨구어준 적은 있었는데. 그게 다인데.

"뭐라고? 합정역에 너를 몇 번 떨구어줬다고? 그것도 가끔?" 그는 기겁을 했다. "힘들다고 매일 징징거려서 나는 아침마다 너희 집에 들렀다고. 너를 강남역까지 태워다주고 그다음에 출근을 했다고! 너 그때 우리 회사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 마포였어! 마포! 나는 매일 지각이었어!"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와아,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만 웃지 못했다. 아닌데.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기는 해. 그런데, 설마 일산에서 강남역까지 매일 데려다줬을 리가! 그는 약이 올라 팔짝팔짝 뛰었다. "8개월이었다고. 자그마치 8개월 동안 그 짓을 했다고!" 8개월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긴가민가해졌다. 내가 일산에서 강남역까지 출퇴근을 한 기간이 진짜 8개월이었기 때문이었다.

8개월 만에 나는 일산 집을 내놓고 강남역으로 이사를 했다. 도어 투 도어,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서 딱 5분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그와는 헤어졌다. 15년도 더 지나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골뱅이소면을 단 한 번도 비비지 않았다던 나, 지각일 걸 빤히 알면서도 기어이 강남역까지 데려다주게 만들었다던 나, 새로 한 머리와 새로 산 지갑을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며칠을 토라졌다던 나. 그 기억이 낯설고도 재미나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예의바르지 않았나 봐. 나는 소면 속에 파묻힌 골뱅이 살을 골라먹으며 생각했다. 우아하게 접시를 모으는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머그잔 콜렉터라도 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 많은 칸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진열장은 내다버렸다. 머그잔은 한 달에 두어 개씩 깨뜨려 급기야 이젠 없다. 자신만만했다던 그 삼십대 초반, 나는 정말 자신만만했을까? 사랑은 했었을까? 아무도 증언해주지 못할 과거의 시간들. 하지만 이러한들 저러한들 아무 상관없이 그저 우습기만 한 걸 보니 내가 낙천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듯.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