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시료 감정결과 '모순'·수사본부 불법 연행·가혹행위 등 꼬집어
52장 판결문 통해 범인 몰고간 증거 부정… 윤씨, 판결선고 직후 소감
'피고인은 무죄'.
윤성여(53)씨는 1989년 10월 화성 병점에서 농기계수리공으로 일하다 경기남부 연쇄살인 사건을 모방한 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1심 판결문은 5장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진술과 검사·사법경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 국과수의 감정의뢰회보서 등을 종합하면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17일 이 사건 재심을 맡은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박정제)는 31년만에 윤씨에게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재판부는 52장의 판결문에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간 증거들을 부정하며 윤씨에 대한 무죄 판단 이유를 판시했다.
1989년 당시 국내 최초로 도입된 국과수의 방사성동위원소분석기법은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재심 재판부는 2개의 시료가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하면 동일한 음모로 볼 수 있다는 감정 결과를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수사본부의 불법 연행과 자백진술을 받는 과정에서의 감금, 가혹행위는 적법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경찰이 윤씨에게 작성하게 한 진술서와 진술조서, 피의자신문조서도 갈수록 구체화되면서 피고인이 알기 어려운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공판 과정에서 윤씨 측 변호인단은 진술서를 당시 수사 경찰관이 대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검사가 직접 지휘한 현장검증에서 윤씨의 자백이 현장 상황과 맞지 않는 점에 대해서도 간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윤씨가 형사사법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를 당시 혼자 떠안았던 것이다.
재심 개시의 시발점이 된 이춘재는 법정에서 "전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방범죄 1건은 내 입장에서 해결이 안 되고 평생 끌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부 이야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자백했다.
당시 수사 경찰관들은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가혹행위를 고인이 된 경찰관이 한 일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다만 당시 진술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을 담당한 경찰관 1명은 과오를 인정했다.
윤씨는 무죄 판결 선고 직후 법정 안에서 변호인단과 지인들의 축하 박수를 받았다. 법정에서 나온 그는 꽃다발을 받아든 채 "저 같은 사람이 다시는 안 나오길 바랄 뿐"이라면서 "모든 재판이 공정한 재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손성배·신현정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