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원시'라는 단어는 안 쓰인지 오래다. 사전에서도 찾기 어려운 말을 2000년대까지만 해도 판사들은 직장에서 공공연히 사용했다. 경원시하다의 뜻은 본래 공경해 멀리한다라는 뜻이었지만, 법조계에선 꺼려서 멀리하다는 의미로 썼다고 한다.
판사 세계의 경원시를 일본말로 이지메(いじめ), 우리 말로 집단 괴롭힘, 두 글자로 왕따로 줄일 수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대한민국 법원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도 법관들은 우리가 쓰는 말과 다른 그들이 사는 세상의 말을 하고 있었다. 공정하고 독립된 판결을 지향하면서 국민이 체감하는 사법서비스는 불량하고 불친절했다. 현대 국어가 아닌 어렵고 긴 문장으로 가득 채운 판결문이 불친절한 사법부의 한 단면이다.

법정에서 판사는 인생 연극의 연출가다. 법정 경위는 재판장이 들어올 때 원고·피고와 대리인, 검사, 피고인과 변호인 배역을 맡은 배우는 물론 방청석에 앉은 관객까지 일으켜 세운다. 법정에선 다리를 꼬거나 팔짱을 껴서도 안 되고 입에 든 껌을 씹어서도 안 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언어 역시 권위주의에 물들어있다. 민사소송은 대리인 없이 당사자가 직접 소송 서류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하고, 법정에서도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다. 법전 위에 국민이 있는데도 변호사를 선임해 작성한 정돈된 서류와 유려한 변론이 아니면 읽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재판부도 있다.
수원지법 민사재판부의 한 법관은 법정에서 당사자가 직접 변론을 하려고 마이크를 옮기는 순간 버럭 화를 내며 "대리인을 통해 주장하세요"라고 고함을 쳤다. '전관예우'는 법조 카르텔의 정수가 아니다. 법원이 국민을 딛고 법대에 올라서 법전으로 친 장벽이 법조 카르텔의 실체다.
법원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판결문에는 그들의 엘리트의식이 아로새겨져 있다.
법조 카르텔의 실체는 전관예우 아닌 법전으로 친 장벽
무변론 패소 판결문 고등교육받은 이에게도 해석 어려워
앞서 가전제품을 압류당한 강씨의 확정 판결과 동일하게 민사 소액 사건 손해배상 피고로 3천만원을 물어주라는 무변론 선고를 받은 이모(35)씨에게 법원이 건넨 문서는 한글을 깨치고 고등교육을 받은 그에게도 해석하기 어려운 다른 세상의 글자였다.
우선 이씨가 수원지법 성남지원 광주시법원이 작성한 판결문을 받아들고 느낀 감정을 직접 들어보자.
"상대방이 3천만원을 달라는 요구안이 담긴 문서를 가지고 민사금전조정신청을 했다가 기각되자 이의신청을 하면서 본안 소송으로 전환이 됐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어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가 무변론 패소 판결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수취인불명과 폐문부재로 재판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인터넷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나의 사건검색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수취인불명은 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제목인 줄만 알았고, 폐문부재는 느낌으로 닫힌 문에 사람이 없다는 뜻인 줄 알았으며 공시송달은 뭍과 물을 오가는 수달 친구인 줄 알았어요. 판결문에 쓰인 가집행, 주문, 청구취지 이런 말도 무시무시하다는 느낌만 받았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게다가 3천만원 이하 소액사건 판결서에는 판결 이유를 기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씨는 왜 그런 판결이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법원이 몇 차례 우편물을 보냈고, 어떻게 본인을 찾아다녔는지에 대한 기록은 나의 사건 검색에서만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씨는 무변론 선고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즉각 항소했다. 이 사건은 현재 수원지법 민사항소8부에서 심리 중이다.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은 경인일보의 자백간주 및 공시송달 통계 요청에 대해 "민사 사건의 공시송달 사유별 건수와 무변론선고 이후 확정 건수, 상소 건수 현황은 별도 통계자료로 관리하지 않아 제공하지 못한다"고 알려왔다.
현재 이씨는 스스로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할 답변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가 법원과 국민권익위원회에 제출하려고 쓴 답변서와 탄원서는 절절하나 비전문가 티를 벗을 순 없었다.
이씨의 답변서는 법원의 언어로 쓴 것이 아니다. 법조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 읽히는 것도 아니다. 운동기구를 쥐었던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이씨의 국어와 법원이 구사하는 문장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

형사 피고인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고, 법정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앉아 있거나 자기 잘못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법원은 판결문에 '개전의 정이 현저하지 않다'고 쓴다. 이 문장에서 쓰인 한자는 총 5글자다.
개전의 정이 없다는 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의 경기도지사 시절 당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개전(改悛)의 정(情)이 현저(顯著)하지 않다는 말은 뉘우치는 마음 또는 반성하는 태도가 없다고 쉽게 풀어쓰면 된다. 개전의 정이 없다는 표현의 기원은 묘연하다. 나이든 판사들 역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건의 실체를 조사하는 형사 사건보다 더욱 '개전의 정이 현저하지 않은 법원의 언어'는 민사와 등기, 행정에서 뚜렷이 보인다.
민·형사 공통적으로 금원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실생활에서 금원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금액, 돈을 법원은 금원이라고 한다. '가사'(假使, 가정해 말해)는 주부가 하는 가사노동이 아니고 가령의 옛말이다.
예컨대 혹은 이를테면 이라고 해도 될 텐데 숙련된 부장판사급 재판장이나 이제 막 형사단독 재판부를 맡은 저연차 판사나 '설시'(說示·사전적 의미로 알기 쉽게 설명해보임)를 할 때 가사라는 말을 종종 법정 마이크에 대고 쓴다.
끝도 없다. 법원에서 경락은 마사지가 아니다. 경락은 경매로 동산 또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일을 의미한다. 경매 낙찰을 줄여서 경락(競落)이라고 한다. 해태(懈怠)는 기아 타이거즈 전신 프로야구팀이 아니다. 법률 행위를 할 기일을 이유 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무책임'과 같이 쉽고 편하게 우리네가 쓰는 말로 모두 바꾸면 안 될까.
판사가 알기 쉽게 '설시' 할 때도 실생활에 쓰지 않는 말로
법원은 맞춤법·일본어식 표현 순화 등 자성에도 '제자리'
법원도 판결서 작성과 법원 문서, 용어 사용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구책 마련에 나선 지 오래다. 1997년 12월 법원 맞춤법 자료집을 발간한 뒤 2010년 12월 읽기 쉬운 판결서 작성 핸드북을 발간하고 2013년엔 시대에 맞춰 법원 맞춤법 자료집을 새로 발간했다.
실제 작성한 판결서 문장을 바탕으로 맞춤법에 관한 다양한 용례를 소개하고 일본어식 표현을 순화하는 등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법원도서관 관계자는 "판결문이 길고 복잡한 문장, 한문 투의 문어체와 일본어식 표현 등으로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법원도서관은 판결문과 각종 법률문장을 작성할 때 우리 글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법률문장 맞춤법 검사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각종 맞춤법 자료집, 간결한 판결사례집 발간 등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법원 구성원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간결한 판결 사례집을 발간하는 등 한 걸음 더 국민께 다가가겠다"며 "앞으로 더 국민들이 판결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기획취재팀■ 법률 용어 설명
수취인불명=해당 주소지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배달하지 못한 경우
폐문부재=문이 닫혀 있어 아예 사람을 만나지 못해 돌아간 경우
공시송달=공개적으로 게시해 보냄 송달간주 보낸 것으로 보다
경락=경매로 동산 또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다
계쟁=문제를 해결하거나 권리를 얻기 위해 당사자끼리 법적 다툼
해태=게을리하다. 제때 하지 않다
궁박=절박한 사정
구거=도랑
도과=기간을 넘기다
경합=경쟁하다, 맞서 겨루다
가사=가령, 이를테면
금원=돈, 금액
상당함=상응하는, 타당한, 해당하는
성부=성립하는지 안하는지 여부
인부=인정하는지 부인하는지 여부 변소 해명 석명 밝히다, 밝혀내다
자백간주=당사자가 변론에서 상대방 주장사실을 명백히 다투지 않은 경우
무변론판결=피고가 소장을 받고 30일 이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법원이 변론 없이 판결하는 경우
진술간주=기일에 출석하지 않은 당사자가 미리 제출한 소장, 답변서, 준비서면에 적혀 있는 사항을 진술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취하간주=양쪽 당사자 모두 변론기일에 불출석하거나 당사자 쌍방이 2회 불출석해 소송절차가 중단된 경우

※기획취재팀
글 : 손성배, 배재흥 기자
사진 : 김금보·김도우 기자
편집 : 김동철, 장주석 차장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