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를 낀 항구도시이자 접경도시인 인천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대표하는 도시다. 근대 문물이라는 혼돈의 파도를 몰고 온 '개항',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 같은 질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기억 유산'이 유독 많은 도시가 인천이다.
기억 유산을 바로 세우는 작업 또한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 얽힌 역사가 영광뿐이라거나 어두운 면만 갖고 있지 않기에 사회적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최근 인천 지역에서 우여곡절 끝에 기억 유산이 바로 선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그 장소들을 직접 찾아 역사를 기억하고 여러 생각을 해볼 좋은 기회가 열렸다.
지금은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가 된 중구 월미도는 1950년 9월15일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장소다. 지난 2일 월미도 월미공원에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가 섰다. 인천상륙작전 닷새를 앞두고 미군은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상륙지 월미도 일대를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희생됐고 마을도 초토화됐다. 이후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고향까지 잃었다. 월미도 원주민들의 피해는 인천상륙작전 전공에 가려 60년 가까이 묻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진실'로 규명하고 희생자 위령 사업, 원주민 귀향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권고 이후 주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령비를 건립하기까지 13년이 더 걸렸다. 위령비 문구에 폭격 주체인 '미군'을 명시할지 뺄지를 두고도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위령비에 '미군'을 새겼다. 이 위령비는 군부대가 나간 이후 공원과 유원지로 바뀐 월미도의 잊힌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게 한다.
인천 내항 1부두에 있는 옛 세관창고를 중심으로 조성한 '인천세관 역사공원'이 지난 16일 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건축물로 치부했던 세관창고의 역사 가치를 100년이 지나서야 재조명한 사례다. 인천세관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1911년 건립된 세관창고는 '인천세관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건축물 자체가 인천항 개항과 근대 세관·관세행정 역사를 담고 있다. 역사관에는 1883년 인천해관 설립부터 광복 전후까지 근대 개항사의 중심이었던 인천세관 역사를 전시했다. 당시 인천세관은 수입물품에 대한 징수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우편, 검역, 기상 관측 업무까지 맡았다.
옛 세관창고는 2010년 수인선 철도 건설계획으로 사라질 뻔하다가 지역사회와 학계 요구로 철거하지 않고 현재 장소로 이전해 복원했다.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역사공원 조성으로 보안구역이던 인천 내항 일부가 시민에게 개방되는 효과도 거뒀다. 역사공원은 인천시와 인천본부세관 상징조형물, 잔디광장, 포토존 등으로 꾸몄다. 공원은 수인분당선 신포역 1번 출구 쪽이다. 신포동과 개항장 거리, 인천차이나타운 등 주변 관광지와도 가깝다.
이승훈 베드로(1756~1801)는 1784년 베이징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세례받은 후 돌아와 우리나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주역이다. 이로 인해 한국천주교회는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자발적으로 시작된 세계 유일의 교회가 됐다. 이승훈은 신유박해(1801) 때 정약종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 이승훈 일가에서 아들·손자·증손자 등 4대에 걸쳐 순교자 5명이 나왔는데, 세계 가톨릭사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라고 한다.
이승훈 묘역은 인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 있다. 인천시는 내년 12월까지 이승훈 묘역 일대 4만6천㎡에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지하 2층~지상 1층(연면적 1천614㎡) 규모의 천주교 역사문화체험관을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 17일 이승훈 역사공원 착공식이 열렸다. 인천시는 2011년 이승훈 묘역을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했다. 천주교 측에서 2013년부터 성역화·공원화를 추진했으나, 개발제한구역 내 시설물 건립 제한 등의 문제로 다소 늦어졌다. 이승훈 역사공원이 조성되면 순례자와 시민들 발걸음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