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에서 남한 최대 규모 우익 청년조직이었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1949년 1월 해산 이후에도 '족청계'라 불릴 정도로 한국 정치계의 한 축을 이뤘다.
고여 우문국(1917~1998) 화백의 부인 최분순(91) 여사가 인천에서 유일한 족청 1기 여성 간부로 활동할 당시 족청 인천시단도 그 규모가 상당했다고 한다. 최 여사가 간부로서 강화군의 섬까지 모두 순회하며 연설할 정도로 족청은 단원 모집에 적극적이었다.
족청은 경기도 수원 간부훈련소에서 1~10기까지 간부 수료생 3천475명을 배출했고, 단원은 전국적으로 110만명이 넘었다.
대중일보는 1947년 4월1일자 기사에서 그해 3월30일 인천 송학동 제2공회당에서 이범석(1900~1972) 단장을 비롯해 단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족청 인천시단 결성식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후 단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족청' 1~10기 간부 수료생 3475명
전국 단원 110만여명 상당한 파급력
족청이 해방 이후 인천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분석이 있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가 2012년 족청에 대해 쓴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보면, 1948년 5월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족청'이란 타이틀을 걸고 출마한 후보 가운데 인천 을구의 이성민(족청 인천시단장·인천제일화학흥업주식회사 사장)이 있다.
당시 미군정은 제헌 국회의원 당선자 중 인천 갑구의 무소속 곽상훈(1896~1980), 강화군의 무소속 윤재근(1910~1972)을 족청 인사로 봤다.
곽상훈은 제헌 국회부터 5번의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낸 인천 우익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족청 인천시단 명예단장이었다.
족청 강화군단장을 맡았던 윤재근의 제헌 국회의원 당선은 최분순 여사가 순회 강연 활동을 했던 강화 지역의 족청 조직 규모 또한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인천 갑구 곽상훈·강화 윤재근 연관
을구 '죽산 조봉암' 당선과 연결도
죽산 조봉암(1899~1959)의 제헌 국회의원 당선도 족청과 연결된다. 조봉암은 족청에서 출마한 이성민과 같은 인천 을구에 출마했다.
이원규 작가가 2013년 쓴 '조봉암평전'에는 인천 을구 선거가 조봉암과 일제강점기 군수공장 간부를 지낸 김석기 간 양자 대결로 좁혀졌을 때 족청 인천시단 부단장인 강원명(1917~1999)이 죽산을 돕겠다며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이후 이성민 후보는 사퇴하고 족청은 조봉암을 지지했다.
후지이 다케시는 앞선 책에서 "조봉암이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려 할 때마다 족청계와의 관계가 부각될 정도로 조봉암과 족청계가 공유하는 정치적 영역이 존재했다"며 "족청계의 제거는 전향 사회주의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