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쑥날쑥한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 결정으로 산업재해 '불승인'을 받은 이들은 법원의 판결을 요청한다. 그 수만 매년 4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업무상 질병을 호소하며 산재 요양·유족 급여를 신청한 뒤 판정 결과를 통보받기까지 평균 183.6일이 걸린다. 긴 시간에 따른 경제적·정신적 고통은 고스란히 유족과 노동자 몫이다.
■ 공단 '불승인' 결정…법의 심판 구하는 유족·노동자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에서 산업재해 '불승인'된 유족 등이 향하는 곳은 '법원'이다. 산재보험보상심사위원회 재심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업무상 질병은 재심사에서 뒤집힐 확률이 극히 낮다. 최근 3년간 매년 400건씩 업무상 질병관련 행정소송이 제기되고 공단 전체 행정소송의 66%를 차지하는 이유다.
공단의 '2020년 소송상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확정판결이 나온 공단 행정소송 1천892건 중 공단이 패소한 소송은 247건(패소율 13.1%)이다. 여기에 패소를 예상하고 공단 스스로 소송을 취하한 사건(386건)을 합하면 공단 패소율은 21.6%로 뛴다. → 표 참조

특히 공단 행정소송 10건 중 6건은 '업무상 질병'에 속했다. 공단 패소 사건 247건 중 136건(55.1%)도 업무상 질병관련 소송이었다. 질판위에서 산재가 아니라는 판정이 법원에서 뒤집히는 사례가 상당수라는 지적이 나오는 지점이다.
노동자와 유족의 고통이 더 극심한 이유는 '시간 지연'이다. 질병과 직업환경의 관련성을 당사자나 유족이 증명하기도 어려운데, 질판위에서 산재 승인 여부를 판가름하는 판정 결과를 받기까지는 평균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행정소송으로 가면 최대 3년은 기다림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공단 재심사에서 뒤집힐 확률 낮아
행정소송 매년 400건씩 66% 차지
'직업성 암' 처리 소요시간 306.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윤미향(민·비례)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공단이 업무상 질병을 처리하는 기간은 평균 183.6일로 전년 대비(172.4일) 11.2일 늘었다. 그중 '직업성 암'은 평균 소요기간이 306.3일로 약 10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는 건강보험과 산업재해보상보험 통합 보상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혜선 가톨릭대학교 예방의학교실 교수(부천 건강근로자센터장)는 "유족과 노동자들은 산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정신적 고통은 물론, 경제적 고통에도 시달린다"며 "우선 건강보험을 처리한 후, 산재 결정이 나오면 산재보험으로 정산하는 통합 보상체계가 마련되면 유족과 노동자들의 피해가 줄어들고 복지체계도 탄탄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왜 그들은 법원으로 향하나
질판위는 질병과 직업환경 사이 '인과성' 증명에 초점을 두지만, 법원은 노동자 건강권을 폭넓게 인정한다.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당사자와 유족이 사법부 판단에 기대는 이유다.
전문가는 유해물질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사람마다 제각각인데도 질판위가 단지 규정에 명시된 업무량·업무시간·업무강도·업무책임 등만 따진다고 지적한다.
정혜선 교수는 "수천명이 같은 공간에서 일해도 업무상 질병이 발생하는 이들은 소수인 것은 사람마다 유해물질 노출에 따른 반응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라면서 "질판위가 단지 업무량 등 기준만으로 판단해 이 같은 개인의 차이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2020년 산재 관련 행정소송 확정판결 중 공단이 패소한 247건을 보면, 1건을 제외하고 모두 패소 사유가 '법원과의 견해차이'라는 분석이다. 그중 증거판단의 견해차이가 195건(78.9%), 법령해석의 견해차이가 51건(20.6%)으로 많았다.
공단 패소 1건 제외 '견해차이' 분석
법원이 폭넓게 노동자 건강권 인정
주목할 점은 공단과 법원이 노동자가 기존에 앓고 있던 질환의 악화에 대해 분명한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공단은 병세 악화가 시간 흐름에 따른 자연적 현상이라는 의견인데, 법원은 기존질환 등이 있더라도 업무환경이나 스트레스를 이유로 악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질판위 구성원들이 전문성을 가졌다고 하지만, 법원은 실제 질판위의 의견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노동자 복지를 위해 노력할 공단보다, 오히려 법원이 폭넓게 노동자 건강권을 인정한 셈이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질판위가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산재보험의 취지와 상반된 행정을 하고 있다"며 "보다 폭넓게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고 법원의 판례를 따라 승인 판정 사례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손성배·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