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2년, 여전히 불안하다

[n번방 사건 2년, 여전히 불안하다] 창문 넘어 들어온 '검은 손'… 가해자는 지금도 같은 아파트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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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인천의 한 아파트에 사는 20대 여성 정혜수(가명)씨는 지난해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지난해 7월 며칠 전부터 아파트 복도 창문에서 누군가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혜수씨는 곧장 아파트 인근 지구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경찰은 일단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지켜보자고 했다. 혜수씨는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방 안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 남성이 혜수씨의 방 창문을 살짝 연 뒤 휴대전화를 들이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겼다.



이를 확인한 혜수씨는 112신고를 했고, 경찰은 주변을 수색해 2시간여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인 용의자 40대 남성 A씨를 특정했다.

하지만 경찰은 현장에서 확인한 A씨 휴대전화에서 불법 촬영물로 보이는 사진이나 영상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해 경찰서까지 임의동행했다. 이날 용의자 A씨는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후 귀가했다.

혜수씨는 최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경찰의 이러한 초동 조치에 분노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방 안에 설치한 카메라에 용의자가 휴대전화를 들이미는 정황이 담겼는데도 불법 촬영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며 "A씨가 도주한 2시간 동안 영상을 지웠을 수 있고, 애초 다른 휴대전화로 촬영했을 수도 있다. 경찰이 현장에서 무엇을 근거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20대 女 혜수씨, 불법촬영 정황 신고
이웃 주민 특정했으나 '증거' 미확보
조사과정 4번이나 '피해 진술' 반복


혜수씨는 불법 촬영과 주거침입 피해자 신분으로 경찰서를 방문했는데, 경찰이 당초 현장에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했기에 형사과에서 진술해야 했다.

사건의 본질인 불법 촬영 혐의에 대한 고소장은 별도로 써내야 했다. 이 때문에 혜수씨는 자신이 불법 촬영 피해자라는 증거를 직접 모아 고소장을 써낸 후에야 여성청소년과 수사관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혜수씨는 "여성청소년과 수사관들에게 '성범죄로 단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불법 촬영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가 담긴 영상을 보여주며 수사관들을 설득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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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다중이용시설 여자화장실 입구에 '불법촬영은 범죄입니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발생한 지 약 4년이 지났지만, 유사한 또는 이보다 진화한 수법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인지역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피해자 지원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자의 절반가량은 10·20대 여성이었다. 2022.3.2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이 과정에서 혜수씨는 경찰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공포스러웠던 그날의 경험을 형사과, 민원실, 여성청소년과, 신변 보호 요청 담당자에게 총 4번이나 진술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주거침입 혐의로 형사과에 우선 접수된 사건이어서 형사과가 계속 수사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오해한 것 같다"며 "결코 성범죄 수사를 축소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피해자가 여러 부서를 찾아 각각 진술해야 했던 점에 대해선 "원스톱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여러 번 진술을 반복하게 한 부분은 유감"이라며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정 조치했다"고 덧붙였다.

경찰 진술 최소화 시스템 무용지물
'성범죄' 불기소… 주거침입만 적용
"9개월 지났는데 여전히 불안 떨어"

원스톱 시스템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여성경찰관 등 전담 수사팀을 배정해 피해자가 진술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인데, 혜수씨 사건의 경우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경찰은 혜수씨의 고소장을 접수한 지 닷새 후에야 A씨가 제출한 휴대전화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을 했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A씨는 지난해 11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미수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혜수씨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혜수씨는 "사건 이후 9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경찰의 신변 보호를 믿을 수 없어 사설 보안업체까지 신청했다"며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이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편, 가해자 A씨는 주거침입 혐의로 4월께 열릴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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