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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지만 피해자를 20년 이상 돌보아온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장 가까운 유족 중 한 사람으로서…."

창원지법 형사4부(부장판사·장유진)는 지난해 4월22일 중증 지적장애가 있는 20대 딸을 숨지게 한 여성 A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빼앗은 잔혹한 범죄였지만, A씨가 범행에 이르기 전 21년 동안 피해자를 사랑으로 보살핀 사정 등이 양형 이유에 반영된 것이다.

'자살' '처지'… 부모의 고통 드러나
정신·경제적 돌봄부담 갈수록 심각


올해도 수원·시흥·인천·서울 등에서 발달장애인 자녀가 부모의 손에 숨지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시 성동구에선 40대 여성과 6살 발달장애인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고, 같은 날 인천시 연수구에서도 60대 여성이 뇌병변 장애를 가진 30대 딸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불과 두 달 전쯤인 3월2일에는 수원시 장안구에서 40대 여성이 8살 발달장애인 아들을 숨지게 했고, 같은 날 시흥시 신천동에선 50대 여성이 20대 발달장애인 딸을 살해했다.

발달장애인 자녀가 부모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건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 부담 속에 경제적·신체적 어려움 등이 동반되면서 끝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원시 장안구 반지하 자택에서 8살 발달장애인 아들을 숨지게 한 40대 여성은 미혼모로 기초생활 수급자였다. 시흥시 신천동에서 20대 발달장애인 딸을 사망케 한 50대 여성은 화원을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웠으나 생활고와 함께 갑상선암 투병까지 견뎌야 했다.

인천 연수구의 60대 여성 또한 범행 전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여성 역시 둘째 딸이 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딸을 함께 돌보는 과정에서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앞서 2019년 8월 남양주시에서 30대 발달장애인 아들에게 농약을 먹여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성은 폐암 말기인 남편이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처지를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했고, 2018년 4월 경북 포항에서 9살 지적장애인 딸을 살해하려고 시도한 혐의로 기소된 여성 역시 남편과 이혼 후에 열악한 재정 환경에서 딸과 생활했다.

'사회' '국가'… 안전망 단어도 언급
지원체계 구축 등 사회적 책임 요구


경인일보는 2015~2021년 사이 부모를 포함한 가족이 피고인에 이름을 올린 '발달장애인 살인·살인미수 사건' 판결문 8개의 양형 이유를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순으로 정리했다.

범행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공통된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결과 '자살', '처지', '비관' 등 보호자가 느꼈을 개인적 절망부터 '사회', '국가' 등 사회적 안전망과 관련한 단어들도 언급됐다.

이와 관련해 울산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박주영)는 앞서 2020년 5월29일, 9살 발달장애인 딸을 숨지게 한 여성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장애아동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한 개인과 그 가족에게 얼마나 힘들고 가혹한 환경인지 절감하게 된다"며 "피고인 개인을 비난하면서도 중벌에 처할 수 없는 이유는, 결과에 상응한 적정한 형벌과 실제 선고되는 형벌 사이의 차이만큼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잘못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은 국가와 사회에 지속적인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최근 낸 성명서를 통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들이 매년 수차례 반복되는 원인은 분명하기에, 이러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 이제는 국가가 나설 차례"라며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 등 돌봄 부담 완화를 요구했다.

/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