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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 상황에서 사법부의 판단도 제각각이다. 사진은 서울 관악구의 한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연합뉴스

스물세살, 첫 아이를 가졌던 당시 A씨에게 쏟아졌던 말은 마음에 비수로 꽂혔다. "대책 없이 혼자 낳아서 어떻게 살아" "지워야지" "다 너 위해 하는 말이야" 친구들은 물론 아이 아빠, 심지어 부모님까지 A씨를 외면했다.

홑몸이 아닌 상태로 홀로 가정을 꾸리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미혼모 시설에 입소하려면 임신 중기가 지나야 하고 정부 지원마저도 턱없이 부족했다. A씨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지인 집에서 지내다가 단기로 작은 고시원 방을 얻었다"며 "방세를 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임신한 걸 티 내면 취업이 안 되니깐 감추는 게 힘들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사회 복지사조차 애를 왜 낳았냐고 다그쳐…

아이를 출산한 뒤에도 차별적인 시선은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그는 "오랫동안 도움을 줬던 사회 복지사조차 감당 안 되면서 애를 왜 낳았느냐고 다그쳤던 게 기억에 남는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마냥 행복하다'고 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히 큰 과제다. A씨는 "월세 내고 아이들 학원비, 식비까지 다 지출하면서 살아가려면 지금 벌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늘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그는 "정작 목소리를 내고 싶은 가정은 일하느라 바쁜 게 현실"이라며 "한부모 가정 형편에 따른 구체적인 지원 지침 마련과 함께 다자녀인 경우에는 양육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작 목소리를 내고 싶은 가정은 일하기도 바쁜 게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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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싱글대디가정지원 협회인 아빠의 품 대표 김지환(45)씨는 9살 된 자녀를 홀로 키우고 있다. 그는 혼인 외 출생자 신고 주체가 아이의 어머니여야 한다고 규정한 가족법의 불합리성을 세상에 알렸고 2015년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사랑이법) 마련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법이 제정됐지만 자녀 존재를 입증하려면 여전히 소송을 거쳐야만 한다"며 지난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022.9.8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한국싱글대디가정지원 협회인 아빠의 품 대표 김지환(45)씨도 9살 된 자녀를 홀로 키우고 있다. 가족법(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혼인 외 출생자 신고는 '어머니'가 해야만 했던 2013년, 김씨는 자녀 출생신고까지 1년4개월 간 소송을 이어가야만 했다. 김씨는 "미혼부 자격으로 자녀 출생신고를 해야 해서 법원을 여러 차례 오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아이는 건강보험 혜택 등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아이를 돌보면서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적도 있다"고 덤덤히 말했다.

양육 포기하게 만드는 요소 사회 곳곳에
"건강하게 자라날 방안 먼저 고민해야"

김씨는 자녀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어려움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그는 자녀를 후견인으로 선임하고 성과 본을 창설하기 위한 허가 신청 소송을 한 뒤 가족관계등록부를 새로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유전자 검사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아이가 본인 자녀라는 걸 입증할 수 있었다.

김씨는 고민 끝에 거리로 나섰다. 그는 1인 시위를 통해 미혼부가 겪는 자녀 출생 신고 어려움을 알렸고 정치권은 혼인 외 출생자 신고 제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사랑이법)을 2015년 신설했다.

사랑이법으로 인해 어머니의 신원 정보를 알지 못해도 유전자 검사를 거쳐 신원을 확인한 뒤 가정법원을 통해 친자 확인을 하면 자녀 출생신고가 가능해졌다.

김씨는 지난해 사랑이법 역시 위헌이라는 취지로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김씨는 "개정안 시행 전보다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혼부가 자녀 출생신고를 하려면 재판을 거쳐야만 한다"며 "법과 제도는 한부모 가정인지 따져 묻는 게 아니라 신원이 불분명한 아이를 일단 출생 신고부터 가능하게 해 국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처럼 한부모 가정은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 없이는 '자립'이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저마다 사정은 달라도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를 길러내겠다는 의지만큼은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베이비박스는 현실 속 딜레마를 겪는 부모가 찾는 마지막 선택지일 수 있다며 조심스레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A씨와 김씨는 "부모가 양육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소가 사회 곳곳에 있다. 베이비박스를 찾는 부모는 맞닥뜨린 현실에 비하면 부모임을 숨기는 게 자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비참한 마음을 한 편에 갖고 있을지 모른다"며 "부모가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맡겼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아이가 사회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방안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시은·유혜연기자 s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