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인숙씨. /정지은씨 제공 |
"저희 엄마는 저희 가족의 '접착제'였어요. 저희가 다 독립한 이후에도 중심에서 가족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셨죠. '내 곁에 있어주는 가족끼리 서로 배려해주고 아껴주면서 살자'는 엄마의 마지막 말처럼 (가족들에게) 잘하고 싶어요. 저희가 어떻게 사는지 엄마가 늘 옆에서 봐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정지은(41)씨는 늘 가족을 먼저 생각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고(故) 김인숙(1957년 4월3일~2022년 11월28일)씨는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인천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 명동의 패션 디자인 가게에서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인천으로 돌아와 남편과 과일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가장 최근에는 구월동 농산물시장에서 중도매인 일을 했다.
어린 딸 셋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추억을 만들어주는 다정한 엄마였다. 젊은 시절 일했던 명동거리를 딸들과 거닐면서 기억을 공유하고, 즉흥적으로 부산 여행을 떠나 낭만을 즐기기도 했다.
정지은씨는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기 힘들었을 텐데도 행복해하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심야버스를 타고 도착한 부산 터미널에서 어묵을 먹었다. 그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부산 낭만 여행… 어묵맛 잊지 못해
작은 체구에 손재주 좋아 '다재다능'
'홀로 아빠' 뵈러 자주 모여 추억 나눠
고인은 작은 체구에도 강단이 있는 인물이었다. 손재주가 좋고 다재다능해 못하는 것이 없었다. 뜨개질로 자녀들의 옷과 모자는 기본이고, 식탁보와 방석, 의자 커버까지도 손수 만들었다. 글과 그림, 노래에도 소질이 있었다.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김추자의 '무인도'를 멋들어지게 열창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게 정지은씨의 설명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은 남편에게 '찢백(찢어진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가족들을 웃게 만들었다.
김인숙씨는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면 가족들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첫 여권도 만들었지만 김인숙씨는 마지막 인사도 남기지 못한 채 지난달 28일 영면에 들었다.
정지은씨는 "아빠가 혼자 계시니까 가족들이 더 자주 모이고 있다. 우리끼리 모여 계속 엄마 얘기를 하며 추억을 나누고 있다"며 "이마저도 엄마가 이렇게 가족을 연결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엄마한테 못 해준 게 많아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엄마가 항상 옆에서 지켜봐 주실 거라 생각한다"고 그리움을 전했다.
/유진주기자 yoopearl@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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