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시장통 자리잡은 예배당신은 저잣거리에 있었다
입력 2023-04-17 20:1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4-1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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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지어진 오산감리교회(돌교회)는 오산오색시장 속에 있다. 이 교회가 개척된 건 1904년의 일로, 오색시장(구 오산중앙시장)은 1914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

오산감리교회가 들어선 건 1904년 일이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 목사가 수원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한다. 노블·밀러 선교사를 묶어 지칭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는 19세기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노블 목사의 부인인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 여교사라고 한다.
 

노블 목사는 현재 오산·화성·수원을 엮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노블 부부는 조선에서 두 아들을 이질로 잃었다.

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구 매향여상)다. 수원시 매향동에 지어진 삼일여학교는 1902년 기독교 이념으로 건립됐다.

1904년 초가로 지어진 '오산감리교회'
일제시대 적벽돌로… 한국전쟁때 폭격
1·4후퇴뒤 인민군 본부로 '기구한 운명'
원조로 복구…현재도 오색시장 중심에

노블·밀러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초기엔 초가(草家)로 지어졌다. 1907년 5월 3일의 일이다. 벽돌건물로 교회가 다시 건립된 건 1934년이다. 99㎡(30평) 가량 규모에 적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남았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일대를 점령한 뒤론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



교회에서 인민군 본부로 변한 기구한 운명에 적벽돌 건물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1954년 7월 22일 오산리 844-7번지 일대에 198㎡(60평) 규모 현재의 돌예배당을 지었다. 조영행·조광현·이주찬·황달용이 대지를 기부했고 미군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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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감리교회.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오색시장이라고 쓰인 정면 간판을 지나 20m 남짓 시장으로 이동하면 왼편에 예배당이 나타난다. 시장길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덮여 있고 교회 쪽은 지붕이 없어 내려오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구조다.

오색시장은 경기 남부를 대표하는 전통시장 중 하나다. 인파가 거닐고 생선과 채소를 사고팔고 음식을 나르고 세탁을 하는 시장통 사이에 자리한 고요하고 환한 예배당은 성스러움까지 느끼게 한다. 돌예배당은 겉은 화강암 속은 벽돌로 쌓아올렸다.

화강암으로 만든 표면은 반듯한 면을 외부로 놓고 빈틈없이 메워져 있다. 예배당 위에 세워진 이중 종탑과 뾰족 아치형태의 세로창은 개신교 건물이 아닌 가톨릭 성당 건축을 떠올리게 한다. 오산오색시장, 과거에 오산중앙시장이라 불리던 이 시장이 이곳에 자리 잡은 건 1914년의 일이다.

그러니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이 들어선 주위로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초가로 지어진 예배당은 멸실과 재건축을 반복하며 적벽돌·석조교회·콘크리트교회로 이어졌다. 초가·적벽돌 예배당은 사라졌고 보존된 석조교회와 새로 건립(1984년)한 콘크리트 예배당이 어깨를 맞댄 형태로 지금도 사용된다.

오산감리교회는 오산시장과 한국 교회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건 물론이고 한국 전쟁 원조 물자로 지어졌다는 역사적 가치까지 지닌 건축물이다. 무엇보다 돌예배당의 가치는 저잣거리 속에서 100년의 시간을 보냈다는데 있다. 낮은 곳으로 향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필부들의 일상 곁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성스러운 이웃 교회로 남았다는 사실 말이다.

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진리가 성소가 아닌 저잣거리에 있음을, 신이 말한 사랑이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현장 속에 있다고 말한다. 시장 한복판의 돌교회는 공시지가 높은 시내 곳곳에 솟은 대형교회보다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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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건립된 이천 관고동 양정교회. 일제 강점기 극빈 아동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를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이천양정여자초급중학교가 설립됐고, 이후 개교 10주년 기념으로 양정교회가 지어졌다.

1956년 강당으로 건립 '이천 양정교회'
1981년 교회로 변경… 첨탑·창호 개조
교육사업 힘쓴 양정학교와 역사 같이해

오산감리교회가 시장 속 예배당이라면 이천 관고동 양정교회는 학교 속 예배당이다. 양정교회는 이천양정학교 안에 있다. 학교 운동장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예배당이 보인다. 양정교회는 양정학교 개교 10주년 기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고(故) 김동옥 목사가 일제강점기던 1943년 극빈 아동 교육 목적으로 초등학교교과과정을 개설했고 1946년 이천양정여자초급중학교를 설립한게 시작이다. 지금도 이어져 양정여중학교와 양정여고등학교가 있다. 1956년 개교 10주년 강당으로 지었고 1981년 교회로 변경했다. 현재 중학교 강당으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건립 당시엔 첨탑이 없었지만 1981년 첨탑과 창호를 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정교회의 역사는 곧 양정학교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피해로 미망인이 많이 발생했고 이들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고 김동옥 목사가 신애모자원을 세워 이들을 지원했다. 일제 강점기 극빈아동교육에서 한국전쟁 피해 지원에 교육사업으로 이어진 역사는 참상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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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양정교회.

통행로가 끊어진 '고양 신도제일교회'
전쟁의 기억 지워가고 있는 현실 방증


오산감리교회·이천양정교회 외에 한국전쟁의 모습을 간직한 예배당은 또 있다. 고양시 지축동 신도제일교회 예배당이다. 1945년 설립돼 1951년 지축리(현 지축동)로 이전한 예배당은 미2사단의 전후 복구사업과 연관돼 있다. 미군 지원을 받아 주민들이 인근 창릉천 석재를 조달해 지었고, 1970년까진 교육관과 돌예배당 지하가 교실로도 쓰였다.

인근은 상전벽해다. 고양지축공공주택지구가 들어선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으로 바뀌었다. 산 위의 예배당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도시개발과 함께 사라졌다. 걸어가려 해도 산 주변을 둘러싸고 농원이 있어 울타리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

산 위의 예배당으로 사람이 갈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일대를 뒤집어 수 천 세대 주택을 건설했고 새로 도로를 깔고 터널을 만들었지만 지나간 역사는 산 위에 남겨두었다. 길을 끊은 채로. 이런 상황은 우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된다.

글·사진/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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