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학생이 시골 체육관에서 처음 '발레'와 만났다. 온 마음을 빼앗겼고 곧바로 학원을 등록하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소년의 발레 인생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창단 20주년을 맞은 인천시티발레단 박태희(52) 단장 얘기다.
"경남 거창 덕봉체육관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소품 공연이었어요. 그날 첫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배경으로 '그랑파드되(grand pas de deux)'가 펼쳐졌죠. 남녀 무용수의 2인무인 그랑파드되는 오페라에 비교하자면 아리아처럼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특히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남자 무용수의 모습에 흠뻑 빠졌던 것 같아요. 훤칠한 키에 완벽한 몸매를 가진, 자신감에 찬 표정의 남자 무용수가 세련되면서도 예의 바르게 건네는 섬세한 손끝에 여자 무용수가 손을 살포시 얹는 모습이 그렇게 근사할 수 없었어요. 그걸 지켜보며 '나도 내 눈앞의 무용수 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죠."(웃음)
사춘기 소년이던 박 단장은 사실 공연 포스터 속 발레리나의 각선미에 먼저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포스터를 유심히 지켜보던 아들의 모습을 박 단장의 어머니는 흘려버리지 않았다. 박 단장의 어머니는 "태희야, 발레 보러 갈래"라고 제안했고 박 단장은 난생처음 발레를 '구경'하게 됐다.
발레리나가 아닌 발레리노에게 마음을 뺏기고 40년 가까이 발레를 이어갈 거라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인천시티발레단이 학교 등을 찾아가고 제대로 된 무대가 아닌 체육관 같은 곳에서 여는 공연도 마다치 않는 데는 박 단장 본인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아직 발레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공연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박 단장의 발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활동한 10여년의 시간과 무용단을 나와 자신의 인천시티발레단을 창단한 2003년 이후 지금까지의 20년이다.
인천시티발레단은 정통 발레는 물론, 노래와 발레를 결합한 '뮤지컬 발레',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화한 발레 작품 등 13개의 자체 레퍼토리를 갖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국립무용단원 10여년 활동·2003년 인천서 자신의 발레단 창단
학교 방문 공연… 체육관도 마다않고 전국 방방곡곡 찾아가
'정확한 테크닉' 중요한 장르… 간단한 동작도 수많은 연습
공정의 가치 빛 바랜 시대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 의미 평가
그가 평생직장인 국립무용단을 그만두고 인천시티발레단을 창단하기로 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고 한다.
박 단장의 부친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 함을 강조했다. "직장생활은 10년만 하고 너의 꿈을 이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박 단장이 국립발레단에 단원으로 생활하며 만난 이름난 선배들 가운데, 단원 시절 화려한 영광을 누렸음에도 미래를 준비하지 못해 사라진 선배들도 수없이 목격했기에 그도 마음속으로 준비하던 일이었다.
"아버님이 아주 중요한 습관을 들여주셨어요. 신문을 읽으면 100원씩 용돈을 주셨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면을 꼼꼼히 읽었는데 큰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늘 생각하며 긴장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몸에 익혔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생활하던 그가 인천에 발레단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인천이 아시안게임 유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서울이 올림픽을 마치고 많은 변화를 맞은 것처럼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나면 인천도 중요한 도시가 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인천을 수시로 드나들며 공부했고 연수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 그는 인천이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한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 인천으로 집을 옮기며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서울로 가야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눌러앉았다"면서 "지방 공연이 많은 편인데, 지금은 고속도로 이정표에 '인천'이라는 글자만 보이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발레 인생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국립발레단 단원 시절 콩쿠르에서 '만년 2등'을 극복한 경험을 들려줬다. 발레 기술을 지속적으로 연마해야 하는 발레리노에게는 병역이 중요한 문제인데, 그는 콩쿠르 우승 경험이 없어 입대해야 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우연히 한 교회에 이끌리듯 들어가 한 목사를 만났고, 고민을 털어놓자 목사는 새벽예배를 추천했다.
새벽예배를 다니며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됐고, 다른 단원들보다 일찍 연습을 하고 생각할 시간도 많아졌다. 남산 국립극장까지의 출근길도 택시를 타는 대신 걸어서 다녔다.
"한 20분 정도 걸어 올랐을까요. 다리에 힘도 생기고 좋더군요. 평소 듣지 못하던 남산의 새 소리도 들리게 되고, 새벽예배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장르의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공정이 가치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지금 세상에서 발레라는 예술이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이들이 즐길 가치가 있는 예술이라고 했다.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기보다는 꼼수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자신이 땀 흘려 노력한 만큼만 거두는 발레라는 예술만큼 순수하고 정직한 것이 있겠냐는 것이 그의 얘기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발레라는 클래식한 예술에 마음을 열기 힘든 분들이 많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발레만큼 순수하고 정직한 예술도 없습니다. 발레는 창의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 달리 정확한 '테크닉'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예술입니다. 예를 들면 발레 '토슈즈'를 신고 완벽하게 춤을 추려면 1만 시간이 걸려요. 팔꿈치를 드는 간단해 보이는 동작하나도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매일 성실하게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 또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어떤 작품도 소화할 수 없어요. 정직함, 순수함 등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 시대에 발레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조만간 인천에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인데, 박 단장은 오페라하우스에서 수준 높은 양질의 공연을 올릴 상주단체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전국에 오페라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한 시설들이 있는데, 대부분 대관사업만 하고 있어서 아쉬워요. 외국의 오페라하우스에는 시설과 어울리는 오페라단, 발레단 등이 상주단체로 있습니다. 인천에도 '인천시립발레단'과 같은 상주단체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박태희 인천시티발레단 단장은?
▲1971년 경남 거창 출생
▲거창화산초, 거창중, 거창중앙고, 서원대, 한성대 예술대학원
▲1993년~2004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2020~2021 연수문화재단 이사
▲2005~2021 한국발레협회 이사
▲2019~2022세계무용연맹 이사
▲수상경력 -2022년 한국발레협회 작품상 수상/2021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 예술가상 수상/2002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표창/34회 인천광역시 문화상 수상 공연예술부문/35회 신인무용콩쿠르 발레부문 특상/28회 동아무용콩쿠르 은상/23회 동아무용콩쿠르 은상
▲안무 -뮤지컬 발레 신데렐라/장화신은 고양이/뮤지컬 발레 호두까기인형/신들의 산책/성냥팔이 소녀
▲연출 -빨간모자/호두까기인형/동아시아국제발레페스티벌/ 뮤지컬발레 심청 /뮤지컬발레 흥부와 놀부/창작발레 춘향/ 미녀와야수/알라딘/지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