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 '사과 씨앗 같은 것' 전시 작품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
백남준은 1980년 뉴욕현대미술관 강연 '임의 접속 정보(Random Access Information)'에서 예술과 소통의 교집합을 '사과 씨앗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벤 다이어그램에서 겹치는 부분은 마치 씨앗 모양처럼 생겼는데, 이 씨앗은 백남준에게 있어 예술과 소통이 교차해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당시 새로운 매체였던 비디오의 잠재성을 의미했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사과 씨앗 같은 것'은 그동안 백남준이 펼치고자 했던 예술세계, 이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소통의 과정들을 살펴보며 더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 씨앗을 잘 심어 자랄 수 있게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마르코폴로' 뉴비틀 타 동서양 넘나드는 로봇
동료 바우어마이스터 '피아노와 편지' 인상적
'나는 이 곡을…' 후면부 개방 작동원리 공개
백남준아트센터 '사과 씨앗 같은 것' 전시 작품 '마르코 폴로'.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마르코 폴로'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 작품으로 동서양을 넘나든 마르코 폴로를 로봇으로 표현했다.
백남준이 새롭게 만들어낸 20세기의 마르코폴로는 꽃으로 장식된 폭스바겐 뉴비틀을 타고 이동한다. 붉은 네온의 상형문자로 이루어진 얼굴과 발, 동서양의 건축물 이미지와 추상적인 전자 이미지들이 빠르게 변하는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흐르는 정보들로 세계가 연결되는 '전자 고속도로'를 달리며 과거와 미래를 경험한다.
국내에서 첫선을 보이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신소장품 '랜덤 액세스 오디오테이프'와 '연장선 있는 오디오테이프 헤드'.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전시했던 '랜덤 액세스'를 재제작한 이 작품은 마그네틱 테이프를 풀어놓고 원하는 부분을 긁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예술의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나타내며 시간의 구조를 조작하고 비디오의 임의적 접근 가능성을 내다본 백남준의 사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클래식 음악부터 일상의 소리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으며, 백남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관람객들의 자발적 참여, 피드백 등 소통의 단계를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사과 씨앗 같은 것' 전시 작품 '피아노와 편지'.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
백남준과 동료 예술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편지들로 이루어진 작품 '피아노와 편지'도 인상적이다.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는 존 케이지, 실바노 부소티, 백남준, 벤저민 패터슨 등 전위 음악을 하는 음악계, 미술계, 문학계 인사들이 모인 장소였다.
전시된 피아노는 당시 콘서트에 사용됐던 피아노의 잔해이고, 편지와 사진은 바우어마이스터와 백남준이 주고받았던 것이다. 100여 개가 넘는 손편지에는 작품의 설계와 사적인 이야기는 물론,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까지 나누고 있었다. 관람객들과의 소통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소통 방식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사과 씨앗 같은 것' 전시 작품 '랜덤 액세스 오디오테이프'와 '연장선 있는 오디오테이프 헤드'.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관람객들이 잘 볼 수 없었던 작품의 내부를 공개해 흥미를 더 한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금장 액자에 20대의 모니터, 영상으로 고전 명화들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지나가는 작품 '퐁텐블로'와 텔레비전 내에 설치된 카메라로 회전하는 뮤직 박스의 기계장치를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작품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에서는 작품의 뒷부분을 개방해 백남준이 다룬 기술과 원리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이 밖에도 흘러나오는 월광과 함께 머리 위로 펼쳐진 '달은 가장 오래된 TV', 동서양이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했던 키플링의 주장을 반박하며 만든 위성 프로젝트 '바이바이 키플링', 황금빛 궤에서 비밀스럽게 펼쳐 보이는 '버마 체스트' 등을 전시장에서 만나게 된다.
또 백남준아트센터가 백남준과 함께 일한 동료 예술가, 테크니션, 프로듀서, 큐레이터 등 16명의 인물을 인터뷰한 프로젝트를 통해 겉으로 보이는 이면에 존재한 백남준의 삶과 예술을 다룬다. 전시는 내년 2월 12일까지.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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