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2)] 적군 '기습남하' 제동 건 천안·금강 지연전투

한반도 첫투입 미24사단 강력한 저항… '파죽지세' 북한군에 공포를 선사하다
입력 2023-06-19 20:26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6-2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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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

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 참패했다.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가 천안전투이다. 앞서 딘 사단장은 스미스 부대 후방으로 제34연대를 보내 안성과 평택에서 북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러브리스 연대장은 전투도 벌이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과 접촉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사단장의 뜻을 어긴 것이다.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을 점령한 뒤 계속 남하했다.

한반도에 급파한 스미스 부대
'T-34 전차' 앞세운 北에 참패
적군 1만2천명에 맞선 시가전
일방적으로 밀리며 진격 허용



마틴 연대장, 전차포격에 전사
딘 사단장, 대전전투서 포로로
전력 오판… 대부분 패했지만
15일 끌어줘 전열 확보 재평가

천안 금강 지연 전투1
천안-전의-금강-대전에서 북한군을 맞아 지연전을 전개한 24사단장 윌리엄 F. 딘 사단장(오른쪽)과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

천안의 34연대는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1개 중대를 경부국도로 북상시켜 북한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접촉을 유지했다. 이 부대는 북쪽으로 전진하다가 부대리(현재 천안시 부대동)인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날 34연대는 연대장이 바뀌었다. 딘 사단장이 안성, 평택의 무단 후퇴 책임을 물어 러브리스 연대장을 해임하고, 로버트 마틴 대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마틴은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장교로 2차 세계대전 때 딘 사단장과 함께 싸웠으며, 딘 사단장이 극동사령부에 전입을 요청, 하루 전날 일본에서 대전에 도착했다.

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와 북한 3사단, 105전차사단이 천안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이 2천여명인데 비해 북한군은 1만2천여명에 전차로 중무장한 터였다. 아침 6시부터 북한군은 성환 쪽 국도를 타고 천안의 서북쪽과 동북쪽의 도로로 진입했다. 전날 미군이 800여 발의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지만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북한군이 밤 사이 제거했거나 불량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전은 북한군의 일방적 우세였다.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전차는 천안역사 등 건물과 교회, 차량들을 포격했다. 미군이 잠복했을 만한 엄폐물을 제거한 것이다. 미군 장병들이 수류탄과 2.36인치 로켓포로 2대의 전차를 부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오전 8시 마틴 연대장은 직접 로켓포로 전차를 공격하다가 적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이틀 만에 전사한 것이다. 딘 사단장은 연대장이 전사하자 부연대장 와들링턴 중령으로 하여금 병력을 수습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천안 금강 지연 전투3
천안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7일 국도를 따라 북상하며 부대리(현재 천안시 부대동)를 정찰하는 미 34연대 병사들. 종군기자인 칼 마이던이 찍은 사진으로 라이프지 1950년 7월 17일자에 실렸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가 전의전투이다.

천안 바로 남쪽 전의에서 미 24사단 제21연대는 7월 9일부터 12일까지 북한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사단과 싸웠다. 34연대가 천안전투에 전력 손실을 입어 뒤로 빠지고, 21연대가 전면방어전을 펼친 것이다.

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개미고개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이곳은 경부선 철도와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개미고개 동쪽 미곡리에 제1대대, 남서쪽 송성리에 제3대대, 개미고개 남서쪽 5㎞ 보덕리에는 11포병대대, 그 아래 조치원에 연대본부를 뒀다.

7월 9일 북한군이 전차 11대를 앞세우고 전의 방면으로 공격해오자 포병대대의 155m 곡사포와 4.2인치 박격포를 집중하고, 미 제5공군 전폭기가 폭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적 전차 10여대와 차량 30여대를 파괴했다. 10일에는 북한군이 우회하여 박격포 진지를 함락시켰고, 미 공군의 폭격이 뜸해지자 사력을 다해 미 제1대대의 미곡리 방어진지를 공격했다.

미 제1대대는 제3대대로 철수하여 합류했고, 오후 2시에 3대대가 반격하여 1대대 진지를 회복했으나 북한군의 야간공격에 대비해 다시 3대대 진지로 철수했다.

이날 미 공군의 전폭기가 대량의 화력을 퍼부어 전차 38대, 자주포 7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다. 미군 도 처음으로 M-24 전차 8대를 투입하여, 북한의 T-34 전차와 대전차전을 벌였는데 아군 전차가 7대, 적 전차는 1대가 파괴되는 등 화력의 열세를 절감했다.

11일 새벽 21연대 제3대대가 미곡리 진지를 다시 점령했으나 북한군에 의해 빼앗겼고, 12일에는 북한군이 새벽부터 지휘소를 집중포격하여 통신소와 탄약저장소를 파괴했다. 이때 북한군은 4사단을 대체하여 3사단이 한층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미군을 맹공했다.

미 제3대대는 통신이 두절된 데다 북한군 전차 4대가 진지를 돌파해오자 대혼란이 빚어져 병사들은 각자 진지를 벗어나 조치원으로 철수했다.

미 24사단 21연대는 조치원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가 조치원 북쪽에서 진지를 구축했는데 북한군 2천여명이 동·북·서쪽 3개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스미스 대대장은 혼란을 무릅쓰고 1개 중대씩 축차적으로 차량을 이동시켜, 금강을 건너 남쪽으로 안착시켰다.

34연대도 천안 남서쪽으로 철수하여 가벼운 전투를 치르고 수촌리를 거쳐 공주 금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은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금강 남쪽 세종시 대평리에서 금강 방어전을 펼쳤다. 딘 24사단장은 금강에서 적을 최대한 저지시키기 위해 제19연대를 투입, 공주-대평리-신탄진 강안 30㎞를 차단하게 했다.

제19연대는 북한군의 주공격로인 대평리에 화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군 4사단이 14일 미 34연대가 방어하는 금강하류 공주쪽을 건넘으로써 서쪽이 뚫렸다. 북한군 3사단은 15일부터 대대적으로 대평리 일대 도하에 나섰다. 전차와 포병이 포를 쏘고 야크기까지 동원하며 도하를 거들었다. 미 19연대는 기관총과 포병, 공군기의 폭격까지 동원하여 격퇴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날 밤 미군의 조명탄이 20여분 간 중단된 틈을 타 남쪽으로 강을 건넜고, 상류쪽 합강리로도 도하를 시도했다.

16일 오전에는 북한군이 중앙 정면을 건넜고, 전차의 엄호 아래 대대 진지까지 습격했다. 북한군은 후방으로 깊숙하게 침투하여 제19연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미군은 16일 밤부터 뿔뿔이 흩어져 24사단 본부가 있는 대전으로 철수했다.

뒤이어 대전에서는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미 24사단과 북한 3·4사단, 105전차사단 사이에 한국전쟁의 운명을 건 '대전전투'가 벌어졌다.

천안 금강 지연 전투
미 24사단 19연대 병사가 금강 남쪽 대평리에서 강을 건너려는 북한군 3사단에 맞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24사단은 오산-평택·안성-천안-전의-조치원·공주-대평리-대전에 이르는 경부 축에서 싸웠고 대부분 패했다. 북한군의 전력을 오판했고, 준비도 미흡했다. 딘 사단장은 금강(대평리)전투 직후 대전전투에서 패하고 그 자신이 북한군 포로가 됐다.

그러나 요즘 한국전쟁 초기 미 24사단의 전투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이 전투를 통해 아군은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력을 확인하고 화력 증강에 나섰다. 북한군은 24사단의 강력한 저항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공포감을 느꼈으며, 남진을 머뭇거렸다. 천안과 전의전투에서 북한 4사단은 병력의 절반 정도가 희생됐다.

24사단이 죽음을 무릅쓰고 15일이나 시간을 끌어줬기 때문에 아군이 영동과 김천을 거쳐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전열을 정비할 기회를 얻었다. 전투는 패했지만 전략적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한 것이다.

/대전일보=김재근기자,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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