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4)] 기능 금메달리스트 향한 기술 '훈련 또 훈련'

원현우 한국폴리텍대 교수
입력 2023-06-21 14:57 수정 2023-11-02 17:12
원현우 교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전 세계 기술인들은 2년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무대로 모여 기술력을 겨룬다. 주인공은 단연 한국이다. 한국은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기능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2019년 러시아 카잔 올림픽까지 30차례 열린 대회에서 19차례 종합 우승을 차지한 압도적 기술 강국이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주요 종목은 용접, 판금·철골구조물, 금형, 주조 등 이른바 '뿌리기술'이다. 조선, 자동차, 반도체 같은 국가 기간산업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어서 뿌리라는 명칭이 붙는다.

원현우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는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금메달리스트다.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열린 모든 직종 경기를 통틀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원현우 교수는 최우수선수상(알버트비달상)까지 거머쥐었다. 기술인 세계의 톱스타다.

한국 경제 부흥을 이끈 '산업화'는 이제 낡은 단어쯤으로 여겨지지만, 산업화 시대 피어난 뿌리기술을 계속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원현우 교수는 "그렇게 해야 산업이 굴러가고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산업도시 인천 출신 기술인이다.

■손재주 좋은 소년, 인천기계공고로

원현우 교수는 1992년 12월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나 중구 연안부두, 연수구 청학동과 옥련동, 옹진군 영흥도로 여러 번 집을 옮겼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소년 원현우가 지낸 인천 시가지 풍경은 20~30년 사이 상당히 변했다. 1990년대 연안부두는 어린아이들에게 또래가 많이 사는 아파트촌이면서 어시장처럼 볼거리가 많은 놀이터였다. 원 교수가 살던 연안부두 항운아파트는 소음·분진 피해로 인한 송도국제도시 이주 대책이 지난 1월 확정돼 최근엔 빈집이 늘었고 머지않아 사라지게 된다. 옥련동에서 다닌 능허대중학교는 2019년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했다.






송림·청학·옥련동… 92년생 소년 본 풍경

어린시절 가전제품 분해·조립하며 놀이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 꽂는 아들 본 아버지

손재주 알아보고 인천기계공고 실습실 데려가


원현우 교수는 어린 시절 사고뭉치였다.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이것저것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가전제품이 원래대로 작동하면 다행이었지만, 망가져 버린 것도 있었다. 돼지코처럼 생긴 콘센트 구멍에 쇠젓가락을 꽂아 보기도 했다. 모두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손재주가 있음을 이때부터 알아봤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 원 교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실습실로 아들을 데려갔다. 원현우 교수는 학생들이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인천기계공고 자동화기계과 선배들이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우수 기능반'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집 안 물건을 분해하고 조립만 하다가, 철판으로 형상을 창조해내는 판금 작업을 선배들처럼 직접 해보고 싶어 인천기계공고를 택했습니다. 기능반 선배들의 최종 목표가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이라는 것도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인천기계공고는 인천 산업사(史)와 궤적을 같이 한다. 인천기계공고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5월 경기도교육청이 설립한 3년제 인천공립직업학교로 출발했다. '인천기계공고 80년사'를 보면 1940년 기계과 2개 학급, 야금과 1개 학급이 개설됐으며 그해 252명이 지원하고 128명이 합격해 입학했다. 지원자 252명 중 인천 출신이 51%로 절반을 조금 넘었고 서울·경기도 20%, 충청도 12%, 영남·호남 6%, 기타 지역 11%였다. 일본인은 9명이었고 만주 출신도 1명 있었다. 당시 인천 지역 중등학교로는 인천공립직업학교를 비롯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 인천공립고등여학교(현 인천여상), 인천공립중학교(현 제물포고), 인천상업전수학교(현 동산중), 인천소화고등여학교(현 박문여중)가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는 전시 체제로 전환된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요충지이자 산업 거점으로 경성(서울)과 인천을 주목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9월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개정해 서울 용산, 영등포 일대와 인천을 토지 수용이 가능한 공업지역으로 지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11월 인천 일지출정(현 미추홀구 용현동), 학익정(현 미추홀구 학익동), 송현정(현 동구 송현동), 송림정(현 동구 송림동) 일대 529만6천500㎡를 '공업용지 조성지구'로 지정해 조선기계제작소(현 동구 HD현대인프라코어 자리) 등 대규모 공장들을 세웠다. 인천 최초의 도시계획상 공업지대다. 이어 경성과 인천 사이인 부평 지역에도 660만㎡ 규모 공업지대를 조성했으며, 이 지역에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인 일본육군조병창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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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께 인천공립공업고등학교 시절 학교 전경. 현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자리로 좌측에 수봉산이 보인다. /인천기계공고 제공

'한국 근대 공업사 1876~1945'(2021·푸른역사)를 보면,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 경성과 인천을 포괄하는 '경인시가지계획'을 공포하며 "경성, 인천 부근은 반도 정치, 경제의 중추부일 뿐만 아니라 황해를 두고 중국 대륙에 근접해 대외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인천축항공사 및 한강수력전기공사의 진척과 더불어 각종 대공장의 건설이 잇달아 일대 공장지로서 발전할 기운이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인천공립직업학교는 인천 공장지대로 인력을 공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1944년 인천공립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됐고 당시 신입생은 기계과 97명, 야금과 51명, 조선과 47명이 입학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부평 조병창 등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강제로 동원됐다. 해방 후 1946년 6년제 인천공립공업중학교로 개편했고, 1951년 3년제 인천공업고등학교로 전환했다가 1976년 정부가 특수목적고교로 지정해 인천기계공고로 교명을 바꿨다. 당시 '기계공고'로 전환한 공업고등학교는 부산기계공고, 성동기계공고, 충남기계공고에 이어 인천기계공고가 4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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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국가대표 향해 '훈련 또 훈련'

원현우 교수는 고교 1학년부터 판금 직종 우수 기능반에서 활동했다. 판금은 1.2㎜의 얇은 철판으로 환기구 같은 형상을 주어진 도면대로 만드는 직종이다. 철판을 치수에 맞게 판금 가위로 잘라 원통 모양으로 말거나 구부려 부품을 만들고, 각 부품을 용접하거나 볼트로 이어붙여 작품으로 완성한다. 평면의 철판을 입체 형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1㎜ 오차로도 형상이 틀어진다. 정밀함이 중요한 복합 기술이다.

당시 특성화 고등학교들은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목표로 직종별 선수를 육성하는 우수 기능반을 운영했다. 원현우 교수는 기능반 입구에 붙은 역대 인천시·전국기능경기대회와 국제기능올림픽 수상자 명단을 보고 "처음으로 꿈이란 걸 갖게 됐다"고 했다. 그 꿈은 곧바로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로 향한다.

고교 1학년때부터 판금 우수 기능반
처음 생긴 꿈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
눈오나 비오나 학교 남아 연습 열중
전국기능경기대회 판금 우승 차지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이란 최종 목표를 정하고 나서 중간중간의 목표를 세웠어요.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1위를 해야 하죠. 평가전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1·2위를 해야 나갈 수 있고, 전국 대회 출전 자격은 지역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목표를 이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원 교수의 고교 시절은 '훈련 또 훈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수업을 마치자마자 기능반에 가서 철판을 자르고 꺾고 붙였다. 학교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대회가 가까워지면 주말도 명절도 없이 훈련에 매진했다. 학창시절 내내 놀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겨울에 기능반 언덕에서 눈썰매를 탄 게 훈련을 빼고 남은 기억이다. 너무 힘든 나머지 기능반 활동을 포기하는 친구도 속속 나왔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로 원 교수는 2학년 때 출전한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판금 직종 2위를 차지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우승해 전국기능경기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인천을 덮쳐 문학경기장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친 날에도 혼자 학교에 남아 판금을 연습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기능반 창문이 깨질 것 같이 흔들렸는데 연습에 집중하느라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고 말했다. 곤파스가 지나가고 2주 뒤 원현우 교수는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판금 직종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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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인천기계공고 시절 원현우 교수. 판금 작품의 치수를 재고 있다. /원현우 교수 제공

판금 국가대표 평가전은 전년도 전국 대회 입상자들과 치렀다. 전년 대회 우승자는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한 선배였다. 3차례 평가전 중 1차 평가전은 원현우 교수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고, 2차 평가전은 전년 우승자인 선배가 승기를 잡았다. 마지막 3차 평가전에서 원 교수의 점수가 갑자기 확 떨어졌다. 그렇게 원 교수는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탈락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버렸어요. 평소와 다르게 작업이 술술 잘 풀리는 느낌이었는데, 작품을 완성할 때쯤 하나의 포인트를 확인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됐어요. 그 포인트 하나가 잘못돼 형상이 다 틀어져 버렸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어머니가 전화해 '아들 잘했어?'라고 먼저 물었는데, '아니 잘 안 됐어'라고 말하곤 펑펑 울었어요. 어머니는 '괜찮아, 고생했어'라고 위로해주셨어요."

국가대표 평가전 어이없는 실수로 탈락
한 가지 포인트 어긋나 형상 틀어져
어머니 전화드리며 펑펑 울었던 기억

지역기능경기대회, 전국기능경기대회, 국제기능올림픽으로 이어지는 기술인 경기대회는 하계·동계올림픽 스포츠대회 운영 구조와 흡사하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하계·동계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병역 특례 혜택을 준다. 기능경기대회 우승자는 주요 기업에 특별 채용되기도 한다. 기술인을 육성하려는 정책적 노력이다. 다만 교육부는 학교 현장에서 기능경기대회 입상을 위한 과도한 경쟁을 막고자 2020년부터 각 학교 우수 기능반을 동아리 활동으로 바꾸도록 하고 대회 운영 방식을 개편했다.

기능경기대회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도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인천시 기능경기대회는 2013년 42개 직종 534명이 출전했는데, 해마다 출전자 수가 줄더니 올해 대회는 36개 직종 251명 출전에 그쳤다. 10년 사이 대회 참여자가 절반 넘게 감소했다. 기능경기대회 입상자가 예전처럼 대기업 특별 채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데다 특성화고 진학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원 교수는 "1980년대만 해도 전국기능경기대회 수상자들이 인천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대회 위상이 높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회적 관심이 많지 않고 지원도 부족하다"며 "우선 기능경기대회에 대한 많은 홍보와 관심이 필요하고, 기술인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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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제2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인천기계공고 출신 기계제도, 선반 직종 선수들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며 시민들에게 축하받고 있다. /인천기계공고 제공

정부가 공업고등학교 지원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친 때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다. 1977년 2월2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5개년 계획을 세워 전국 79개 공업고등학교의 시설을 우수 학교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관련 부처에 지시한 후 "앞으로 각료, 고급 공무원, 기업인들은 지방에 가는 기회에 인근 공고를 들러 보고 관심을 많이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전국의 기계공고를 순회하기도 했다.

인천기계공고 교장실에는 1970년대 말에 설치한 화장실이 있는데, 교장을 위한 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방문에 대비해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인천기계공고를 찾진 않았고 1979년 10·26사태가 났다. 이 시기 인천기계공고는 4천770㎡ 규모의 종합실습실을 신축하는 등 교육 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인천기계공고는 1978년 인천 대기업인 대우중공업(현 HD현대인프라코어 전신)과 자매결연을 맺고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1980년 인천기계공고 총 재학생은 개교 이래 처음으로 3천명을 넘어섰다.

당시 정부는 선반 등을 이용해 기계부품을 정밀하게 다듬는 작업을 하는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신설했다. 정부는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딴 학생에게 병역 특례와 장학금 등을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인천기계공고 강선구 교장은 1980년 인천기계공고 졸업생이기도 하다. 강선구 교장도 고교 3학년이던 1979년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장학금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사장을 맡았던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이 지급했다. 강선구 교장은 "당시 대우중공업이 매일 실습실에 빵을 넣어주기도 했고, 실기 지도 교사들에게 별도의 수당도 지원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기계공고 교장들을 면담할 때 정밀가공기능사 취득자가 많은 순서로 자리를 배치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공업고등학교 육성만큼은 관심이 컸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룬 올림픽 금메달의 꿈
'야스리?' 선배 말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이제는 울산 사투리 섞어쓰지만요.
원현우 교수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10년 11월 HD현대중공업에 특별 채용됐다. 국제기능올림픽의 꿈이 좌절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울산에 있는 HD현대중공업 조선소 현장으로 투입됐다. 원현우 교수는 대형 선박의 엔진룸에서 엔진과 주요 기계장치를 연결하는 파이프를 설치하고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기능경기대회 훈련과 산업 현장은 많이 달랐다. 일단 말부터 막혔다. '야스리'(쇠줄) 같은 현장 용어는 물론이고 인천사람이 울산 사투리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장 사수 선배가 쓰는 말이 내가 아는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익숙해졌고요. 지금 제가 쓰는 말에도 사투리가 섞이게 됐습니다. 학교 기능반에서 훈련할 때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반듯하고 편한 자세에서 용접했는데, 현장에선 천장에 매달리거나 좁은 연료탱크 안에서 거울을 보면서 용접해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자세로 고품질을 내야 하는 현장은 기량과 노하우가 모두 중요했습니다."

졸업 전 HD현대중공업 특별 채용
불편함 많은 현장에선 노하우도 중요
철골구조물 직종 바꿔 국가대표 출전

2012년 국제기능올림픽 출전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회사 기술교육원에서 원현우 교수에게 철골구조물로 직종을 바꿔 국가대표 평가전에 출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가 회사 동기와 함께 입대하려고 휴직을 신청한 직후였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겠다"고 외치고 입대를 미뤘다. HD현대중공업은 국제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기술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기업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바이어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인들을 확보하고 있다'라는 강점을 부각한다는 차원이다.

철골구조물은 판금보다 훨씬 두꺼운 6㎜, 9㎜ 두께의 철판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직종이다. 가스 용접기로 철판을 녹여 절단하고 모양에 맞게 구부려 도면으로 제시된 건축물이나 중장비 모형을 만드는 작업이다. 재료 자체가 무거워 힘들면서도 적게는 0.5㎜ 오차까지도 내선 안 되는 정밀함도 요구된다. 철판은 용접할 때 열을 받아 늘어났다가 식으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는데, 이러한 오차까지 계산해야 해 무척 까다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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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현우 교수가 2013년 독일 국제기능올림픽 철골구조물 직종에 출전해 만든 중장비 모형. /원현우 교수 제공

철골구조물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은 직종이었다.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는 국가대표 평가전 탈락자를 대상으로 다시 평가전을 진행했다. 1년 동안의 현장 경험은 원현우 교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넉넉한 점수로 평가전에서 우승해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태극 마크를 달았다. 기쁨은 잠시, 원현우 교수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훈련 또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 과정에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다른 친구들보다 입대가 늦어질 걱정 따위로 좀처럼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목표를 금메달에서 대회 MVP(최우수선수)로 수정했습니다. 목표를 상향하고 나니 할 일이 많아졌어요. MVP를 위해선 작품 치수의 오차는 당연히 제로(0), 용접도 누가 봐도 완벽할 정도로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부분까지 신경 쓰게 된 거죠. 구멍을 0.1㎜ 더 크게 뚫으면 어떻게 될지, 아니면 위치를 그만큼 옮기면 더 나을지 등을 계산하고 시도하면서 논문 한 편 쓸 정도로 데이터를 쌓았습니다."

원현우 교수는 2013년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철골구조물 경기에 나섰다. 철골구조물 직종에 일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14개국 선수가 출전했다. 국내 대회와 다르게 각각 선수의 작업을 누구나 볼 수 있게 열린 공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관람객들이 몰려 원현우 교수의 작업을 지켜봤다. 일본 쪽 코치는 원 교수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을 촬영하기도 했다. 원 교수는 '그래 보여줄게'라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코리아 원현우 98.94점 
만점 가까운 점수로 금메달 거머쥐어
최우수선수 '알버트비달상' 수상까지

올림픽 경기에선 중장비와 타워브릿지 모형 등이 과제로 제시됐다. 원현우 교수가 머릿속에 축적했던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모든 과제가 다 나왔다. 오차를 줄일 방법도 이미 계산됐다. 자신 있게 철판을 잘라 말거나 구부리고, 거침없이 붙여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동안 수도 없이 연습했던 작품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경기 결과를 발표한 시상식 당일 대회 전광판에 철골구조물 금메달 수상자로 '코리아(KOREA) 원현우'라는 글자가 마침내 떴다. 경기 점수는 100점 만점에 98.94점으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원현우 교수는 태극기를 들고 오른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든 경기의 시상식이 끝나자 장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대회 총책임자는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알버트비달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또다시 '코리아 원현우'가 호명됐다. 원 교수는 태극기를 다시 들고 시상식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그는 "아직도 시상식 영상을 보면 설렌 마음에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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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현우 교수가 2013년 7월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최우수선수상인 '알버트비달상'을 수상했다. 원 교수는 알버트비달상 발표 직후 금메달을 목에 건 채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회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원현우 교수 제공

■고향 인천은 후배들이 있는 곳

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원현우 교수는 회사 기술교육원에 배치돼 용접과 배관·의장 설치 교육을 맡는다. 기술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기술과 이론을 겸비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원 교수는 2014년부터 회사 야간대학 조선해양과에서 전문학사 학위를, 이후 학점은행으로 기계공학 학사 학위를 각각 받고 부산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다녔다.

2019년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일주일에 세 번씩 야간에 왕복 180㎞ 거리를 운전하며 울산과 부산을 오갔고 육아도 도와야 했다. 원현우 교수는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입사할 때 일했던 현장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회사에 요청했다. 원 교수는 "현장 기술을 더욱 업그레이드해서 국가 공인 명장에 도전하거나 생산 임원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는데, "이것도 기회일 수 있겠다" 생각해 응모했다.

만 29세 한국폴리텍대 교수 '사상 최연소'
배관·플랜트 설비·접합 등 실습 중심 강습
기술인 양성 시스템 고민 "직무급제 찬성"

그는 2022년 1월 한국폴리텍대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로 임용됐다. 만 29세로 한국폴리텍대학 사상 최연소 교수 타이틀이 생겼다. 배관, 플랜트 설비, 접합기술 등을 실습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제자는 90명으로, 30명씩 3개 반을 맡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영어강사로 일하다 입학한 30대 후반 학생, 40~50대 장년 학생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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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현우 교수가 지난 15일 오후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뿌리기술융합센터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보호·이송하는 특수 용기인 '쿼츠웨어'(석영유리)에 용접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수소와 산소로 3000℃에 달하는 열을 가해 퀘츠웨어 부품을 접합하는 특수 용접 기술이다.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

현장 기술인에서 교육자로 새로 출발한 원현우 교수는 기술인 양성 시스템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 교수는 기술인 우대를 전제로 한 직무급제 도입에 찬성한다.  
힘들다고 생산직 꺼려… 기술인 우대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산업 현장에서 위험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대부분 생산직을 꺼리고 있어요. 기술을 유지하고 전수해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산업이 뿌리째로 흔들릴 겁니다. 숙련된 기술인은 직무에 따라 수당을 더 많이 책정해야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부모도 자녀가 위험하고 힘든 직종을 택하길 원하지 않으니까 기계공업고등학교 진학을 선호하지 않게 된 거죠. 직무별 수당으로 기술인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야 합니다. 특성화 고등학교는 가르치는 기술이 무척 다양한데, 학생이 졸업할 때 원하는 직무를 결정해 취업하다 보니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전 다양한 직무를 경험해서 선택하고 고등학교에선 산업 현장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심화하는 과정으로 가면 좋겠어요. 한국폴리텍대학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긴 합니다."

원현우 교수에게 고향 인천은 기술인이 될 후배들이 있는 곳이다. 실제로 원 교수의 모교엔 그를 본보기로 삼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그도 여전히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

원현우 교수는 "큰 목표를 세우고 중간중간 세분화해서 목표를 설계해 놓으며 살아온 것이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준비하면서 또 다른 길이 생기기도 했다"며 "기술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면 기회는 찾아온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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