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받은 경기도지사는 하얀 칠판 위에 '기회소득', '기본소득', '사회보장제도'를 각각 쓰더니 제도 핵심 내용을 나눠 적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고 화이트보드를 이용해 답변을 한 뒤론 내내 재킷을 입지 않고 인터뷰에 임했다. 한 시간 가량 여러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정오쯤 인터뷰를 끝낸 경기도지사는 직원들로 붐비는 경기도청 24층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섞여 밥을 먹었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걸었다. 그 사이 걷어 올린 흰 소매에 고추장 양념이 몇 방울 튀었다.
식사를 마친 도지사는 직원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고 낮 12시 40분 도청 카페에서 만난 직원 모두에게 커피를 '쐈다'. 막히는 법이 없던 답변, 격의 없는 태도, 몸에 밴 매너까지 경기도지사 김동연을 보여주는 여러 장면이 짧은 시간에 노출됐다.
추가투자 경영자도 있어
'돈 버는 도지사 역할'
"정책·사업으로 도민 삶 바로바로 변화"
양봉 농민·전문대학생 등 현장 체감
예술인 K-컬처 잠재력…
장애인 가족 지출 비용 경감되면
전체 사회에 효과
지난 2022년 6월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김동연이었다. 다음 날 동틀녘에야 겨우 결론을 낸 경기도 선거 결과를 두고 지금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김동연 역전 순간'이란 키워드가 회자 된다.
지난해 7월 취임 후 1년, '유쾌한 반란'을 꿈꾼 경기도정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경기도지사와 가장 가깝고, 도지사가 하루라도 지면에서 빠지는 날이 없는 지역언론이지만 경기도백이 직접 되짚은 지난 1년이 궁금했다.
"지난 4월 미국 출장에서 투자 유치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5천억원 규모 투자 약속이었다. 그 자리에서 경기도가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환경보호에 어떤 정책 방향을 지니고 있는지 의욕적으로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더니 미국 측 경영자가 귓속말로 '투자는 노 리미트(no limit)로 하겠다. 1조 투자 더 하겠다'고 하더라. 돈 버는 도지사로서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소신과 철학을 얘기했을 때 반응이 적극적으로 온 게 기억에 남는다.
지방선거 유세 때 연천에 갔다. 거기서 모내기도 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당선되면 꼭 다시 와 달라고 했다. 주민이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당선되고 다시 방문했다.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장애인 얘기도 하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 달라. (자리에서 일어난 김 지사는 백팩에서 편지를 하나 꺼냈다) 어제 아내가 이 편지를 주더라. 아내가 군포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가는데 하반신을 못 쓰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써준 편지다.
손가락도 못 쓰는 아이인데 학교는 휠체어를 타고 가고 대소변도 선생님이 가려준다. 그런데도 애가 밝다. 어제 밤에 받은거라 여기 비서들도 이 편지 얘기는 지금 처음 듣는 거다. 발달장애인도 여러번 만났고 장애인 정책도 발표했다. 그런 분들을 만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나만 더 꼽자면 10·29 이태원 참사다. 경기도에도 40명 희생자가 있다. 2000년생인 젊은 여자분은 여전히 의식 불명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유독 기억난다."
"부총리까지 하면서 정부에서 펼치는 정책, 거대담론, 전국적인 규모의 결정과 사업을 많이 했다. 그때와 (경기도지사인)지금을 비교해보면 '도민의 삶을 바로바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다르다. 부총리할 때 보면 현장에서 어떻게 되는지 변화를 알기 어려웠다. 선별적으로 정보가 올라오니 어떨 때는 보여주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변화가 체감된다.
당선되고 긴급민생경제회의를 열어 양봉업자 지원책을 내놨다. 양봉 농민들을 만나면 지금도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
얼마 전 수원 팔달산에 줍깅(쓰레기를 주우며 하는 조깅)을 갔는데 청년봉사단이라고 청년 60명이 왔다. 그 중에 한 청년이 '제가 전문대 다니는데 자기들 학교에서 경기 기회 사다리 15명이 뽑혔다'는 말을 전해주더라. 그러면서 '여기 없는 선배들, 학우들을 대신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수원 사는 학생들이 아니라 부천, 광명, 구리에서 사는 청년들이 2시간 걸려서 팔달산에 왔다. 감사인사를 하고 싶어서.
실제로 경기 기회 사다리 정책을 하기 전에 도담소(구 도지사 공관)에서 전문대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거기서 학생들이 '지사님 저희는 학교에 있는 동안 외국 갈 기회가 없다. 아주대 총장 하시면서 학생들 외국에 많이 보내셨으니 저희도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의견을 줬다. 팔달산에서 만난 청년이 바로 도담소에서 의견을 줬던 그 대학생이었다."
"예술인들은 생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자신들을 인정해 줬다는 것, 자존감을 세워줬다는 것에 고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K-컬처에 잠재력이 있는 만큼 이분들이 나중에 우리 사회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기회소득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지만, 시장에서 제대로 생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대상이다. 내부 회의에선 가정주부 얘기까지 나왔다. 실제로 경제에 큰 역할을 하는데도 GDP(국내총생산) 계산에 주부 가사노동은 계산이 안 된다. 그런데 가정주부에 기회소득을 제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회소득이 지속가능하려면 대상이 좁아야 한다. 이번 예술인 기회소득 대상이 만 명이 안 되는데 가정주부로 넓히면 대상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대상이 한정돼 있어야 계속 지원이 가능하다. 둘째, 미래를 염두에 두고 우리 사회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거나 사회적 비용을 낮출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예술인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로 변하는 사회 흐름 속에 사회적 가치 창출이 기대되는 분들이다. 기회소득을 받고 이들이 가치를 창출해 사회가 지출해야 할 추가 복지 비용이나 의료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 전체 사회적 비용은 줄어드는 게 된다.
기회소득으로 가족이 지출해야 할 비용이 경감된다면 전체 사회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예술인, 장애인을 기회소득 대상으로 했고 배달라이더(배달종사자)도 검토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김 지사는 화이트보드를 가져와 기회소득을 본격적으로 설명했다. 한국 복지정책을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까지 시기별로 분류하고 왜 지금 기회소득 정책이 필요한지를 역설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한 기회소득 정책은 복지정책이라기 보다는 성장 담론에 가깝다.
공공부조·사회보험·사회보장제도가 메우지 못하는 공간을 기회소득이 채움으로써 사회 전체의 지출 비용을 줄여 미래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 다른 중점 공약인 '북부특별자치도' 역시 성장담론 관점에서 설명했다.
도민들에게 북부특별자치도가 되면 무엇이 변하는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2천만원 수준인 북부의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가 북부특별자치도가 되면 얼마로 오르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소리다. 5년 뒤, 10년 뒤엔 북부가 어떻게 변하는지 포천은 어떻게 변하고 연천은 무엇이 바뀌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구호성으로 가선 안 된다. 바뀌는 모습이 손에 잡혀야 찬성이든 반대든 입장을 정할 수 있다. 모든 규제를 단번에 풀 수는 없겠지만 군사보호구역 중 몇 %가 해제되면 북부는 어떻게 변하는지와 같이 구체적인 내용을 도민들에게 소개해야 하고, 이미 준비 중이다. 곧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거다."
취임 1년을 맞아 평일 오전에 인터뷰를 마친 뒤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도청 내 카페까지 동행했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다음 일정이 있어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라며 김 지사가 자리를 떴다.
매주 기자들에게 공지되는 그의 주간 일정표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어가 있다. 바로 '통상업무'라는 일정이다. 통상업무를 보는 경기도지사는 청사에 머물며 보고를 받고 결재를 한다. 통상업무를 최소화하고 거의 매일 경기도 31개 시군 현장을 찾는 김 지사는 쉬이 쉬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바쁜 발걸음이 이제 4분의 1쯤 왔다. 남은 시간, 바지런한 김동연이 만들 이정표와 성취가 더 궁금해졌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