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송도국제도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로비에서 지하로 향하는 원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대형 스피커를 쌓아올린 거대한 탑이 나타났다. '바벨탑'이라는 제목이 붙은 설치미술가 김승영 작품이다.
작가가 새롭게 창조한 현대판 버전의 바벨탑은 가운데가 비어 있는 원기둥 형태로 아파트 2~3층 높이로 보였다. 원기둥 내부에 서서 천장을 바라보니 알 듯 모를 듯한 인간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탑을 만들어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오만함에 신은 분노했고, 결국 탑을 무너트리고 언어를 뒤섞어 버려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문자를 갖기 이전 인류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현대미술 작품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전시는 시작하고 있었다.
'바벨탑' 문자 갖기전 인류 상상
고대 바빌로니아 '원형배점토판'
'노아의 방주' 원형 이야기 담아
인천시민이 10년 가까이 기다려온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핵심 전시 콘텐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물관은 정식 개관(29일)을 이틀 앞둔 지난 27일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풀어낸 상설 전시 내용을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박준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시운영부장이 전시 설명을 맡았다.
상설 전시 주제는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이다. '위대한 발명'(프롤로그), '문자, 길을 열다'(1부), '문자, 문화를 만들다'(2부), '내일의 문자'(에필로그) 순으로 구성됐다.

전시 1부에서 박 부장이 가장 먼저 소개한 유물은 기원전 2000년에서 1600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원형 배 점토판'이다. 점토판은 쐐기문자 60줄로 홍수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는 인류가 겪은 재난인 홍수를 소재로 하는 신화가 많이 전해졌다. 이 점토판에 수록된 이야기는 신이 인간을 멸망시키려 하자 주인공이 배를 만들어 이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박 부장은 "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인데, 이 점토판은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기록물로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부장이 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함무라비법전 비석 모형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협조를 구해 복제품을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진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생 박물관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진품을 소장하기란 쉽지 않다.
박 부장은 "기원전 2000년 이전 문자와 관련된 유물은 최근 새롭게 발굴되는 경우가 드물고, 유물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각 국가에서 국외 반출 허가를 해주지 않는 추세여서 꼭 소개해야 할 것은 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경우 복제품은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도록 제작했다.

루브르박물관 함무라비법전 모형
543점 진품 소장중 180점 선보여
현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543점의 진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상설 전시를 꾸민 전시물은 모두 180점인데, 원본 136점(76%)과 전시 흐름에 꼭 필요한 44점(24%)의 복제품으로 구성했다. 이 외에도 구텐베르크 42행 성서 초판본 분책 '여호수아서', 고대 로마 정치인 플리니우스가 저술한 서양 최초 백과사전의 이탈리아어 번역본 '박물지'(1476년) 등 진귀한 유물도 만나볼 수 있었다.
정식 개관 기념으로 마련한 '긴 글 주의-문자의 미래는?'이라는 주제의 특별 전시도 충분히 흥미로웠고, 어린이 전용 체험 공간의 다양한 콘텐츠도 매력적이었다.
김주원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관장은 "비교 문화적 시각에서 문자를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일반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전시를 꾸준히 이어가겠다"며 "인천의 랜드마크이자 세계의 대표적인 문자박물관으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