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
"왜 조사도 안 하고 억울하게 잡아가서 민간인을 학살합니까? 시체를 바다에 빠뜨리니 찾지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74살 들어 살면서 아버지 한번 불러보고 싶어도 못 불렀습니다." (김점선씨·통영시 거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집 발췌-
"6살 때 아버지가 마산 괭이바다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돌아가신 뒤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빨갱이 자식' 소리 들으며 컸죠. 그때 상처와 서러움은 말도 못 할 정도입니다." (권택근씨·부산 거주)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건 군인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본인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가 시작되고, 유족회가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70여년이 흘러도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이 자식들에게도 향해지고 있어 정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대상으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실제 취지는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을 약화하고 좌익 성향 사람들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경찰서별로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과 경찰은 아무 관계 없는 민간인까지 무분별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각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 통첩을 보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예비검속돼 경찰서나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이 중 본인이 왜 구금됐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다수였다.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했다는 보고가 정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부는 보도연맹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고, 6월 하순부터 비극적인 학살은 시작된다.
전향자 '반공단체' 할당 채우려 무분별 가입
전쟁 터지자 이유도 모른채 예비검속 구금
북한 점령지서 일부 부역… 정부 '처형 명령'
낙동강 방어선 안쪽, 경남지역 희생자 많아
진화위 1기 조사만 5129명중 1551명 밝혀져
예산 부족해 발굴 유해 신원확인 아직 못해
납골당·추모관도 없어… 컨테이너 보관중
마산 구산면 토지주 거부로 발굴작업 막혀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유해발굴 현장. /경남신문 제공 |
■ 평범한 가장들,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했다
=경남 지역은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정부가 행정권을 유지했기에, 보도연맹 학살 피해가 컸다. 진실화해위원회 1기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밝혀졌거나 추정한 수는 전국적으로 총 5천129명이다.
이 중 경남 지역이 1천551명으로 가장 많다. 2기 진실화해위가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서는 경남지역에 관련 진실규명 신청이 819건이 접수됐다.
유족회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당시 창원지역에서만 민간인 2천300여명이 재판 없이 불법으로 학살당했다. 이 가운데 마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국민보도연맹원, 정치사범 등 1천681명이 희생됐고 그중 4차례에 걸쳐 717명 이상이 마산 괭이 바다에 수장됐다.
이런 사실은 1960년 6월 열린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한 희생자 유족이 당시 마산지역 보도연맹 사건희생자가 1천681명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인됐다.
또 2010년 발표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에서도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혹은 인민군에게 동조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예비검속 한 민간인이 살해된 사실이 언급됐다.
진주 지역 또한 피해가 컸다. 진주형무소는 서부 경남 일대에서 검속된 수많은 국민보도연맹원과 기수용된 수감자들로 포화상태였다. 1950년 7월 29일 진주 방어선까지 북한군이 진격해 30일 밤부터는 진주 서쪽 4㎞ 지점까지 들어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진주는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진주가 점령되기 전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했다. 또한 북한군이 진격해 오던 인근 하동과 산청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당시 진주경찰서에서 근무한 김병두씨는 "한국전쟁 발발 후 후퇴하면서 시작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처형은 입수된 명단을 지서장에서 면 단위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지서에 소집시킨 뒤 특무대가 내려가서 처형했다"고 진실화해위에 진술했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정모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보도연맹원 소집 통보를 받고 경찰서로 나갔다가 구금된 후, 감옥에 500명 넘게 갇혀 있었고, 감옥 방이 10여 개가 있었는데, 방이 꽉 차 우리는 감옥 유도실에 가뒀다. 그곳에서 10여일을 굶고 지내면서 몸에 힘이 없어졌다. 이후 한 차에 100여명을 2명씩 포승줄로 묶어 차에다 밀어 넣고 버스가 꽉 차면 한 차에 순사(경찰관) 7명이 탔다.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는 눕혀놓고 총을 쐈다."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경남신문 제공 |
■ 여러 차례 발굴 이어졌지만, 신원 확인은 안 돼
= 늦었지만, 진실화해위 주도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주 지역에서는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단체의 주도로 발굴이 진행된 바 있다. 2014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유해 39구, 2017년에는 38구를 발굴했고 2021년에는 관지리 화령골에서 유해 16구를 수습했다. 지난해 집현면 봉강리에서는 유해 35구가 발굴됐다. 올해 진행된 발굴에서 29구가 확인됐다.
하지만 발굴된 유해 중 유족과 신원이 확인된 사례는 없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DNA 시료 채취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 안구 시설이 없어 현재 컨테이너 시설에 보관 중인 상황이다.
진주 지역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임시 안치소. /진실화해위 제공 |
정연조 한국전쟁전후진주지역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은 "유해를 모셔야 할 납골당이나 추모관이 없어 컨테이너에 보관하고 있다"며 "정부에서는 세종시에 있는 추모 공원에 보내라고 하는데 유족들은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직 예산 문제를 이유로 진주 지역 희생자들에 대한 DNA 채취는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남지역 잠재적 발굴 가능지는 총 8곳으로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134-6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241-1(용산고개2)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425-1(용산고개4)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84 ▲진주시 호탄동 산 93-2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산 285-5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372-2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산 154-2·154-3·157 등이며, 모두 국민보도연맹사건 관련이다.
아울러 마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산 24 일대는 토지 소유주가 거부해 발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곳은 유해 발굴 가능지이지만, 토지 소유주가 거부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강제할 근거가 없다"라며 "만약 소유주와 협의가 된다면 빠르게 발굴이 진행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경남신문=박준혁기자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