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민주주의의 맹아, 인천5·3민주항쟁] 폭동 '낙인' 찍힌 반독재 투쟁… 민주화운동 가치 계승해야

입력 2023-08-06 20:08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8-07 3면

인천5.3민주항쟁
인천5·3민주항쟁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은 단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했다. 시민회관사거리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는 광장이었다. 1986년의 인천은 1987년 6월항쟁으로 가는 길목이 됐다. /연합뉴스

1986년 5월3일 인천시민회관에 수만명을 운집시킨 동인은 '직선제 개헌' '군부 독재 타도'를 향한 시민 다수의 열망이었다.

시위대와 집회 참가자들이 단일 대오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저곳 흩어져 거리에 나섰지만 이 두 가지는 공통 요구로 내세웠다. 국민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민주 시민으로서 권리를 국가가 힘으로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명제가 37년 전 인천에서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얻어내야 할 투쟁 구호였다.

■ 직선제 개헌 열망에서 시작된 시민 항쟁


인천5·3민주항쟁은 신한민주당(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하 개헌추진위 현판식)이 계기가 됐다.



신민당은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관제(官製)가 아닌 첫 자율 정당으로 1985년 1월 창당해 한 달 뒤 열린 총선에서 제1야당에 올랐다. 이 정당은 직선제 개헌을 기치로 세워 시민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1986년 3월11일 서울에서 시작해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서 개헌추진위 현판식을 이어갔다.

신민당 인천 현판식날 군중 집결
경찰 최루탄-시위대 투석 '충돌'
400명 연행 일부 고문 후유증도

4월30일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민정당(노태우 대표위원), 신민당(이민우 총재), 국민당(이만섭 총재) 대표와 회동하고 개헌 문제를 논의, 합의했다. 신민당은 민주화운동 진영과 거리를 두고 '정치 타협'으로 이 현안을 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대통령과 내각 수반이 권한을 나누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으로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 했다. 직선제 개헌을 통한 군부 독재 종식의 열망을 갖고 있던 민주화운동 진영과 시민 다수는 신민당의 모호한 태도에 불신을 드러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신민당의 인천 개헌추진위 현판식 날짜인 5월3일이 다가왔다. →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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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신민당의 인천 현판식에 대규모 군중이 몰릴 것을 예상하고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과 함께 집회를 준비했다.

노동 단체인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인천기독교노동자연맹(인기노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독자 집회를 계획했다. 대학생 단체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는 각각 행동에 나섰다.

경찰은 집회 봉쇄를 목적으로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했다. 경기도경찰국(현 인천경찰청)은 35개 중대 4천690명을 배치했고 타 시도에서 45개 중대 6천30명을 지원받았다. 집회 하루 전인 5월2일 인천 전역의 숙박업소 1천53개소를 포함한 1천271개소를 검문검색해 시위 관련자들을 연행해 보안사로 보내고 물품을 압수했다.

집회 당일 시민회관 주변 상가의 문을 닫게 했다. 시민회관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은 안양서장·여주서장, 서쪽은 남양주서장, 남쪽은 수원서장, 북쪽은 부천서장·광명서장이 직접 지휘하는 총 34개 중대가 사방을 에워쌌다.

5월3일 정오에 주안1동 성당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시위대의 투석전, 민정당사 화재, 최루탄 운반 트럭의 시위대 돌진 등을 거쳐 오후 6시20분께 해산됐다. 나머지는 주안역, 제물포역, 동인천역에서 산발적 시위를 벌였고 오후 10시께 종료됐다.

이날 하루 약 400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일부는 심한 가혹 행위와 고문을 받아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형법상 소요죄로 129명이 구속됐고 60여 명이 수배됐다. 수배자 수사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해 공권력의 만행이 드러났고 이는 시민의 공분을 샀다.

■ 군사정권 보도 지침으로 규정된 '5·3 사태'

정부는 인천5·3민주항쟁을 급진·좌경 세력이 주도한 폭력 시위로 규정했다. 언론 매체는 '5·3 사태'로 명명하고 연일 인천에서 벌어진 집회의 과격성을 고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인천5·3민주항쟁에 참여한 민주화운동 진영 쪽 인사들도 무심코 '인천 사태'라고 말할 정도로 언론 보도는 반복됐다. 당시 집회에 참가한 이들에게 5월3일의 경험을 물었다.

옛시민회관사거리 부근에서 신발·가방 판매점 '신고벗고'를 운영하는 정태훈(60)씨는 시위 참가 이유를 물은 질문에 "혈기 왕성한 20대였고, '군부 독재 타도'라는 명분 하나로 수천 명이 모여든 현장이었다"고 답했다. 그는 "주안1동 성당 앞 시위대는 콘크리트를 깨 경찰에게 던지는 등 다소 과격한 양상을 띠었지만, 그건 경찰이 먼저 과잉 진압을 시도하면서 시위대가 자극받아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인하대 86학번 서은미(56)씨는 홀로 현장에 나갔다. 경찰이 시위대 한복판에 다연발 최루탄(일명 지랄탄)을 던졌다. 경찰 진압을 피해 들어간 주안초등학교 주변 골목에서 백골단(사복 경찰)과 마주친 상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을 휙 낚아채고, 그 사람을 여러 명이 둘러싸 발로 밟고 때렸다"며 "백골단 사람들이 정말 분노에 가득 차서 때리는데, '인간 백정'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정부 보도지침 '소요사태' 몰아가
"먼저 과잉진압 시도에 자극받아"

인천5·3민주항쟁이 '사태'로 규정된 배경에 정권의 보도 지침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정권은 직선제 개헌 여론에 밀려 수세에 처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인천5·3민주항쟁을 소요 사태로 몰아갔다.

실제 당시 각 언론사에 하달된 보도 지침은 '폭동에 가까운 과격, 격렬 시위인 만큼 비판적 시각으로 다룰 것'(5월3일) '경찰의 과잉 개입이 과격 데모를 유발했다는 식으로 하지 않도록'(5월5일) '대검의 인천 사태 조사 발표, 사회면 톱 또는 1면 사이드 톱 기사로 눈에 크게 띄게 보도할 것'(5월19일) 등이었고 거의 모든 언론사가 지침대로 따랐다.

시민 다수가 인천5·3민주항쟁을 폭동, 소요 사태로 잘못 인식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인천에 40년 이상 거주했다는 박문섭(67·용현동)씨는 "당시 언론 보도를 본 인천사람들은 5.3을 공산주의에 경도된 일부 좌익 운동권 세력의 폭력 시위로 알았다. 지금도 '인천 사태'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전했다. 인천5·3민주항쟁 기념사업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천5.3민주항쟁
1986년 5월 3일 당시 시민회관 앞 사거리 풍경. 당국은 폭력성, 급진성을 부각하게 하는 보도지침을 각 언론사에 하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직선제 개헌 여론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격 시위를 유발했다고 증언한다. /연합뉴스

■ '기념관 건립' '국가기념일 지정' 과제


사단법인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13년부터 인천민주화운동센터(전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인천시는 '민주화운동 기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이 센터를 위탁 운영한다.

센터는 매년 5·3민주항쟁 계승대회(기념식)를 비롯해 청소년 민주주의 체험 마당, 민주시민 강사 교육, 5·3합창단 정기 공연, 인천민주화운동사 발간, 유가족·희생자 치유 행사 등 다양한 계승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안정적 공간 확보'는 인천5·3민주항쟁 계승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미추홀구문화콘텐츠산업 지원센터 4층 일부를 사용하는데, 센터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의 사무 공간으로도 꽉 찰 정도로 비좁다. 전국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인천에만 민주화운동기념관이 없다. 대전 3·8민주의거기념관은 내년 3월 개관 예정이다.

인천에만 없는 기념관 국비 숨통
대구2·28 벤치마킹 기념일 과제


인천시는 2020년 '인천민주화운동 기념 공간 조성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해 부지 선정 조사까지 마쳤지만 흐지부지 끝났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취임 후 '4대 혁신 10대 과제'에 민주기념회관 설립 계획을 담았는데 그 이후 구체적 실행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으로 인천5·3민주항쟁 기념관 건립사업을 국비를 받아 추진할 수 있게 돼 재정 부담은 이전보다 줄일 수 있게 됐다.

인천시 관계자는 "지금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에 집중해 왔다"며 "기념관 건립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현재 논의 중에 있다"고 말했다.

'국가기념일 지정'에 나서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명기된 민주화운동 중 국가기념일이 아닌 것은 인천5·3민주항쟁 뿐이다.

백재호 대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기획홍보국장은 "대구2·28민주운동은 국가기념일 지정 사업을 3년간 추진해 2018년 기념일이 됐다"며 "국가기념일이 되면 시민의 관심이 커지고 국가 예산을 지원받을 근거가 되는 만큼 인천시도 다른 지자체를 벤치마킹해 이 과제를 이뤄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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