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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의 호는 '일석'(一石)이다. 그저 한 개의 돌에 불과하다는 겸손일까. 생전 동료들은 '아인슈타인'으로 불렀다고 한다. 독일어로 아인(ein)은 하나, 슈타인(stein)은 돌을 뜻한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한 개의 돌, 즉 일석(一石)이 된다. 그러면 혹시 자신의 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장단상교(長短相交) 의미를 담은 것일까. 길고 짧음과 크고 작음은 서로 비교함으로써 드러난다. 한 개의 돌에서 꼭 강가의 돌멩이나 길 위의 자갈을 떠올릴 이유는 없다. 하나의 암석으로 이뤄져 있지만 지구보다도 큰 거대 행성도 있으니까. 마치 '우구데이칸의 술잔'처럼 말이다.

몽골 칭기스칸의 대를 이은 우구데이칸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보다 못한 형 주치가 군신의 예를 잠시 접고 형제의 예를 청해 준열하게 꾸짖는다. "대칸이 세운 제국을 술로써 무너뜨리려 하느냐"고. 이에 우구데이는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시겠다"고 약속한다. 주치가 만족해 물러가자 시종에게 명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술잔을 만들어라." 일배(一杯)와 일석(一石)의 크기는 상상력이 좌우한다. 그 일석 선생이 1956년 수필집을 냈다. '벙어리 냉가슴'이다. 여기에 남산골 샌님들의 생활과 지조를 담은 수필 '딸깍발이'를 담았다. 의복은 남루하고 몰골은 우스꽝스럽다. 청렴과 결백, 지조가 있는 삶을 지향하지만 실제 생활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무능해도 청렴·결백 지향하는 삶
우리 민족의 '딸깍발이 선비정신'

하지만 딸깍발이 샌님의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은 우리 사회와 역사, 나아가 민족에 대한 결단이라고 문학평론가인 서울대 권영민 명예교수는 평가했다. 이해타산적 물질주의적 생활에 젖은 현대인을 비판하면서 '선비정신'을 강조했다는 거다. 영화 '베테랑'에서 주인공 형사(황정민 분)가 내뱉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이 한때 유행어가 됐다. 유래는 일본어 '가오(顔)'일 게다. 얼굴이란 뜻인데 체면과 자존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앙큼한 자존심'의 표출이겠다. 이 명대사의 원조는 작고한 배우 강수연이라고 한다. '베테랑'의 연출자 류승완 감독은 강씨가 영화계 동료들을 다독이며 했던 말이 멋있어 언젠가 대사로 써먹어야 하겠다고 생각했고, 이 영화에서 제대로 썼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러한 딸깍발이 선비정신은 만연한 물신주의와 팽배한 '이권 카르텔'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의 방향성을 건강하게 지탱해온 힘일 것이다. 비록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더라도 천인혈(千人血)로 이뤄진 금준미주(金樽美酒)는 곁눈질도 하지 않는 자부심 말이다. 선비는 비록 작은 몸이지만 그 정신은 우주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요즘 자리에 눈이 벌게진 산유(散儒)와 부유(腐儒)들이 들끓는다. "왕은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한 조각 배(君舟民水)"라고 설파한 순자(荀子)는 이렇게 정의했다. 산유는 다방면에 아는 것이 많고 사리에 밝지만 예(禮)를 모르는 별 볼 일 없는 자이고, 부유는 말은 잘하나 도리에 맞지 않는 간교한 언변을 늘어놓은 진부한 자이다. 자고로 출사한 선비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으며, 강자를 누르고 약자와 동행에 헌신했다. 헌데 요즘에는 거꾸로 선사후공(先私後公)과 억약부강(抑弱扶强)이다. 흘러간 강물이 역사의 물레방아를 다시 돌리겠다고 시대를 거슬러 오른다. 무지인가 자만인가. 그리고 과연 노동자와 교사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요즘은 약자 누르고 강자와 동행
남 탓하지 않고 스스로 돌아보며
공생자세 '공인의 자격' 보고 싶어

딸깍발이는 아니라 해도 선비를 닮기라도 하려면 반구제기(反求諸己)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흉내라도 낼 일이다. 일이 잘못되면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태도 말이다. 이기심과 욕망을 이겨내고 대동사회로서 공생하는 자세 말이다. 최소한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은 기본이 아니겠나. '술이 지나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도 지나치면 슬퍼진다'. 제나라 위왕에게 일명경인(一鳴驚人)을 깨우친 순우곤의 통찰이다. 좋은 자리가 늘 좋지 않으며, 나쁜 선택이 늘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禮)와 도리(道理)에 어긋나지 않는 신념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지조가 예나 지금이나 선비, 즉 공인의 자격이겠다. 공인의 선비정신을 보고 싶다.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