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것 없는 여느 날이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고, 평소 걷던 길을 그냥 걸었으며, 아침에 널어둔 빨래를 걷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을 뿐인 '보통날'이었을 것이다.

2005년 4월 19일 인천 남구 용현동 호프집에서 박씨는 지인과 술 한잔 기울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았지만 일면식도 없는 김씨가 뜬금없이 박씨의 뒤통수를 빈 맥주병으로 때리며 공격하기 전까지 박씨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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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08년 5월 15일 19면. /경인일보 아카이브

2008년 5월 10일 인천 중구 도원동 주택가를 걷던 스무살 여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양쪽 허벅지를 찔렸고 집 앞에서 가족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던 28살 여성도 같은 괴한에게 오른쪽 허벅지를 찔렸다. 무차별적으로 여성들의 다리를 찌른 후 범인은 달아나 버렸다.

2013년 8월 18일 빨래를 걷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던 50대 여성은 이웃집에 살던 중학생이 수차례 찌른 칼에 쓰러졌다. 다행히 또 다른 이웃이 이를 보고 신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 사건들 모두 그간 경인일보에 보도된 '묻지마' 범죄 사건이다. 예를 든 사건이 3건 일뿐, 경인일보 기사 DB 검색을 통해 찾아낸 묻지마 범죄 사건은 훨씬 더 많다. 사회면 한 귀퉁이에 조용히 실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을 뿐, 지난 시간 쭉 누군가는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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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12년 8월 22일 1면. /경인일보 아카이브


2012년 8월엔 기어코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은 하도 끔찍해서 이름도 붙었다. '강남진 묻지마 흉기 난동사건'

2012년 8월 21일 오전 0시55분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의 한 주점에 흉기를 들고 들어간 강남진은 여주인을 성폭행하려다 문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놀라 여주인의 목 부위를 찌른 후 달아났다. 도망가는 길 문 앞에서 마주친 손님의 복부를 찔렀고 오전 1시5분께 정자동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대문이 열려 있는 주택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때마침 거실에 있던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자 흉기로 가슴과 복부를 10여차례 찔렀고 비명소리에 놀라 거실로 나온 집주인 아내와 아들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가슴과 양쪽 팔을 다치게 했다.

집주인은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결국 사망했다. 하루를 마감하고 모두가 잠드는 새벽, 이유도 없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괴한에 한 집안의 가장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 누가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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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장안구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사건'의피해자의 집. /경인일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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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12년 8월 22일 23면. /경인일보 아카이브


경찰에 붙잡힌 후에도 강남진은 죄의식이 없었다.

 

2012년 8월 22일자 23면 경인일보에는 강남진의 태도를 취재한 내용이 상세히 적혔다. '강씨에게서 반성과 후회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최초 검거 후 지구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내가 사람을 죽여 감방에 다녀온 놈이다. 겁날 게 뭐 있겠냐"고 했다.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연행된 후에도 "졸려서 조사를 받기 어렵다. 한숨 자고 일어난 뒤 시원하게 다 말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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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장안구 묻지마 살인사건의 용의자 강남진이 수원남부경찰서 진술녹화실에서 진술을 마친 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유치장으로 이송되고 있는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유치장 안에서도 제공되는 식사를 거뜬히 해치운 것으로 전해졌고, 경찰조사에 앞서 "기자들에게 내 얼굴이 공개되면 무조건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2015년 11월 20일에도 사람이 죽었다. 이 역시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희생당했다. 수원역의 한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20대 남성은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다. 범인은 30대 남성이었는데, 옆자리서 게임을 하고 있던 20대 남성 4명에게 칼을 휘둘러 1명이 죽고 3명이 크게 다친 사건이었다.

묻지마 난동이 일어나기 전 범인과 피해자들 간에 어떠한 말다툼도, 갈등도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범인은 자신의 집에서 TV를 보던 중 수원시민들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환청을 듣고 흉기 2개를 준비했고 방송 내용을 다시 확인하러 PC방을 찾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보통날, 일상의 공간에서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공격을 당한 사람들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일상이 불가능해졌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유라도 명확히 알면 좀 나을까 싶지만, 취재를 통해 겨우 전해진 이유란 것이 "친구와 다퉈 기분이 나빠서" "다리가 예뻐서" "혼자 죽기 싫어서" "술에 취해서" "환청이 들려서"였다. 차라리 몰랐다면 덜 허망할까.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