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또 다른 '인천상륙'

입력 2023-09-19 19:4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9-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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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인천시가 준비해온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끝났다. 이번 행사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인천 앞바다 해상에서 역대 최대규모로 재연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노르망디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노르망디가 나찌 독일을 대상으로 연합군이 싸워 이긴 전쟁의 일부였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이 두 진영으로 갈라서 싸운 국제전이면서 한 민족이 갈라서서 싸운 내전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판이하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은 패배를 선언했지만, 한국전쟁은 아직도 종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휴전에는 조인했으나 전쟁 당사자들인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중·러를 한 축으로 하는 진영은 70년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의연히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때도 인천상륙 수차례
세월속에 잊혔던 황태자 요시히토의 방한


그런데 '인천상륙'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도피했던 하나부사가 군대를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되돌아 온 인천상륙이 있었다. 하나부사는 정부를 압박하여 일본인 사상자와 재산 피해 보상을 약속받고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2년 뒤인 1894년에는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 오시마(大島義昌)가 이끄는 여단 8천명의 인천상륙이 있었으며, 1904년 러일전쟁의 첫 전투였던 제물포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한 일본군 12사단, 5만5천명이 상륙하여 서울과 경운궁을 점령하고 용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 사태는 우리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으로 이어졌다.

하나부사의 제물포 상륙, 청일전쟁, 제물포해전에 이르는 무훈담은 일본인들에게 마르지 않는 신화의 원천이다. 그들은 이들 전쟁 이야기를 '우끼요에'(다색 목판화)와 석판화, 우편엽서로 제작하여 판매했다. 인천상륙이 거듭될 때마다 일본은 부상하고 조선은 침몰했으니 그들에겐 두고두고 환호작약할 이야깃거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 주목하지 않는 '인천상륙'이 있다. 1907년 메이지 천황의 황태자 요시히토(嘉仁)의 방한이다. 나중 다이쇼 천황이 되는 요시히토는 군함 카토리호를 타고와 인천부두에 내렸다. 인천거주 일본인들의 열광 속에 대한제국의 이은(李垠) 황태자의 영접을 받으며 인천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세월 속에 묻혀 있다가 33년 뒤인 1940년경 인천교육회라는 단체가 벌인 이른바 '대정천황 성적기념(大正天皇 聖蹟記念)' 사업을 펼칠 때 대대적으로 부각된다. '대정천황께서 이 땅(조선 인천)에 상륙하여 대륙에 제일보를 디뎌 주셔서' 조선은 물론 만주에 이르기까지 수억 인구가 천황의 은혜를 입게 되었으므로 그 '성스러운 상륙 지점'에 황은에 보답하는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 그 건립 취지의 일부이다.

33년 뒤 '위대한 발자취'라며 기념탑 세워
조선강점 침략사 신화로 날조 망각 말아야


요시히토의 인천상륙을 기념하는 상징탑 건립은 일제 강점기 교육행정기구인 인천교육회가 주도했는데 이 사업에 총 1만5천원이 들었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인천부에서 1천500원을 지원하고 나머지는 17만명의 성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1940년경 인천 인구가 17만이었으니 전 주민에게 성금을 강요한 것으로 보인다. 기념탑은 가로폭 32m의 백색 화강석 기단 위에 높이 5.9m의 석주를 세워 전체 높이는 10m에 달하는 조형물로 인천부두 주변의 건물들을 압도했을 것이다.

탑기둥에는 '위대한 발자취'라는 뜻으로 성적(聖蹟)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고 따로 한시 형식의 명문을 새겼는데 그 가사를 옮겨보면 대략 이러하다. '천황의 교화가 천지사방에 가득하고/ 만백성은 성스런 은택을 우러르네/ 천황의 덕이 온세상을 엄호하니/세계가 번창과 평화를 노래하네'. 조선강점과 만주사변 그리고 그들이 벌인 중일전쟁이 천황의 '성스러운 발자취'로 시작되었다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탑의 개막식에는 인천 각중학교와 초등학교 학생 6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인천 항동1가, 영국영사관 언덕 아래에 서있던 이 기념탑은 사라졌지만 그 신화 날조에 광분했던 침략사는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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