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수성동계곡과 기린교 넘어 비해당 터. /최철호 소장 제공 |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버스에서 내리니 윤동주문학관이 손짓한다. 산과 산 사이로 주홍색 지붕들이 마치 유럽과 같다. 목멱산 정상도 코앞에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도 보일 듯하다. 창의문으로 가는 좁고 긴 길은 지네와 같다. 단풍나무 숲을 지나면 한양도성 안 가장 오래된 성문이 반긴다. 600여 년 된 성문 아래 바위가 반질반질 닳았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홍예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홍예문 천장 위에 그려진 닭을 닮은 봉황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눈빛이 매섭다. 이 성문을 누가 오갔을까.
창의문에서 바라 본 주홍색 지붕과 목멱산. /최철호 소장 제공 |
자문 밖을 나서니 인왕산이다. 인왕산 정상은 도성 안이요, 인왕산 기차바위는 도성 밖이다. 도성 밖 무계원 사랑채에 걸터앉아 삼각산 보현봉을 본다. 600여 년 전 안평대군이 거닐던 공간이다. 도성 안 비해당에서 꿈꾼 이야기를 안견이 3일 동안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속 풍경이 바로 여기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는 봄에 와야 제격이다. 복사꽃이 한창 필 때 이상향 찾아 도성 밖을 오갔다. 커다란 바위와 폭포가 흐르는 계곡 아래 무계정사에서 글과 그림을 그리며 가야금과 대금 소리에 활을 쏘았다. 그곳에 '武溪洞(무계동)'이라는 각자도 바위에 남겼다. 안평대군 글씨가 그날의 흔적이다.
1450년 도성밖 무계정사에서
시문·찬문 쓴 '몽유도원도 발문' 완성
안평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로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양녕대군이 폐위되자 충녕대군은 세자에서 왕으로 즉위한 후 셋째를 낳았다. 안평대군은 시·서·화 그리고 가야금도 뛰어난 문화예술계 기린아였다. 혼인 후 인왕산 수성동 계곡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비해당(匪懈堂) 즉 '게으름 없이 한 임금을 잘 모셔라'라며 당호를 하사했다. 안평대군은 아버지와 약속대로 큰 형과 조카를 지키며 '비해당사십팔영' 시와 함께 '몽유도원도' 그림과 발문을 남겼다.
도성 밖 인왕산 기차바위 아래 무계정사 터./ 최철호 소장 제공 |
안평대군은 도성 안 비해당에서 꿈을 꾸었다. 1447년 4월 복사꽃 피는 봄날 박팽년과 함께 산을 거닐고, 폭포 지나 연분홍 꽃 가득한 무릉도원을 향했다. 안평대군이 꿈꾸는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안평대군은 꿈 이야기를 비해당 매죽헌에서 안견에게 설명한 후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도화원 화가 안견 작품이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현실 세계와 이상세계를 집현전 학사들과 논하고, 미래를 고민하였다. 3년 후 1450년 도성 밖 무계정사에서 21명에게 몽유도원도를 보여주고 시문과 찬문을 쓴 '몽유도원도 발문'이 완성되었다. 106.5㎝ 그림에 20m가 넘는 시문이 달린 두루마리식 작품이었다.
집과 별서 사람들 끊임없이 모여
한강변 담담정은 문객들의 사랑방
낙엽 뒹구는 인왕산으로 가보자
자문 밖 안평대군의 별서인 무계정사 터 무계원. /최철호 소장 제공 |
안평대군의 집과 별서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였다. 경치가 좋을 뿐 아니라 1만여 권 책을 보고, 토론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도성 안 비해당과 도성 밖 무계정사 그리고 한강 변 담담정은 안평대군의 집이자 문객들의 사랑방이었다. 하지만 3년 후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안평대군은 형 수양대군에게 강화도로 유배된 후 교동도에서 사사되었다. 안평대군뿐 아니라 '몽유도원도 발문'에 이름을 남긴 김종서·박팽년·성삼문·이현로·이개 등 수많은 사람과 가족들이 스러졌다. 안평대군이 간직한 200여 수집한 작품과 무계정사도 사라졌다. 아쉽게도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있다.
쌀쌀한 바람에 낙엽이 뒹군다. 도성 안 비해당에 기린교만 남아 있다. 도성 밖 무계정사는 흔적도 없다. 안평대군이 새긴 무계동 각자와 고즈넉한 풍경 속 무계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안평대군 '몽유도원도 발문'을 보고 싶다면 비해당과 무계원에 지금 가야 하는 이유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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