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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던가/그럴리 없다고/그럴수 없다고/우리들은 모두 머리 저어 '말도 안돼'만 외쳤던 그날!…너희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무너지고 무너지는 세상에/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단다'

'이제 세상은 몇 번이나 더 무너져야만 할까/벌써 그리운 이름 된 너희들을 생각하며…용서하렴 무기력한 선생님을/진실로 너희를 사랑하지 못한 어른들을/너희에게 더 많은 사랑 주지 못했다고 우시는 부모님을/너희와 그 고통의 순간 함께 하지 못한 우리들을/너희를 보호하지 못한 현실을' - 희생학생들이 다녔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국어교사의 추도시
1999년 화재로 57명 숨진 사건
대부분 인천지역 중·고등학생
市 '술 마신 학생 잘못' 책임 돌려
"폐쇄명령처분… 책임 없다" 주장
       
2022년 이태원 참사… 반복된 비극
피해자 향한 시선은 비정하기만
1999년 10월 30일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의 한 호프집에서 불이 났다. 유난히 날이 좋았던 10월의 마지막 주말, 인천지역 상당수 고등학교들의 가을축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친구들과 재밌게 놀 생각에 신나고 들뜬 마음으로 가득했을 주말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이 사고로 57명이 목숨을 잃었고 7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인천지역의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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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0일 발생했던 '인현동 호프집 화재' 현장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11월 1일자 경인일보에는 참담했던 그날의 현장이 생생히 담겼다. "불길은 놀라운 속도로 혀를 낼름거리며 지하계단을 타고 호프집의 유일한 출입구 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독한 유독성 가스를 내뿜으면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이들은 죽음이 다가오는 줄 몰랐다. 그러다 누군가 "불이야, 대피, 대피"라고 외치면서 실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호프집 내부는 완전 전소되지 않고 출입구 쪽을 중심으로 불에 그을린 상태로 연기만 자욱해 사상자들은 대부분 유독가스에 질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자들은 출입구 반대쪽 주방에서 50여명, 테이블 사이 3개 통로에서 20여명씩 무더기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바닥에는 운동화와 가방, 깨진 맥주잔, 휴대폰 등이 널려 있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줬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도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펑펑 두차례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불이 난 건물 주위엔 늘 불법 주·정차 차량이 많았어요. 소방차가 진입하는데만 10분이나 걸렸습니다. 인공호흡 등 심폐소생을 맡을 응급요원도 부족해 구조된 이들 중 상당수를 길바닥에 20여분간이나 뉘여 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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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자 경인일보.

11월 2일자 3면 '애절한 절규…끝내는 "울음바다"' 기사는 희생된 학생들의 친구들이 겪은 슬픔과 원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친구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학생들은 넋을 잃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교사들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낸 책임감으로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한 채 오열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우는 학생, 빈자리만 멍하니 바라보는 학생,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가는 학생, 더 이상 울 기력조차 없는 학생 등…. 마치 이 세상 모든 슬픔을 모아 놓은 듯 했다. 비통함을 참지 못한 몇 명은 실신해 응급차에 실려가는 일까지 벌어졌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우리들이 갈 곳은 어딘가요? 어른들은 늘 우리를 먼저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릴 위해 해준건 아무것도 없어요. 왜 우리들이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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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자 경인일보.

11월 3일자 경인일보는 화재사고가 대형참사로 번진 데에도 이 업소의 불법영업을 하는데 뒷배 노릇을 하던 관할 공공기관의 부도덕성과 무책임이 근본원인 임을 지적했다. "화재사건이 일어나기 전 경찰은 지난 8월 21일부터 모두 3차례에 걸쳐 불법 영업신고를 접수했으나 모두 '오인신고'로 처리했다. 게다가 인천중부경찰서 이모경위(45)는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호프집 실제 사장 정모(34)씨의 집에서 2년이 넘게 세들어 살았던 것이 밝혀져 유착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K군은 "전무라는 파출소에서 정기적으로 사장을 찾아와 밀실에서 얘기를 나눴으며 돈을 건네는 것도 여러차례 봤다. 전무라는 사람이 휴대폰으로 단속정보를 제공받아 학생들을 숨긴 뒤 문을 닫는 방법으로 단속을 피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경찰과 관할 자치단체인 중구청 등 공무원과의 유착비리가 사건 초기부터 화두에 올랐고 고위직 간부들도 수사대상에 올랐지만 결과는 '꼬리 자르기'였다. 사건이 발생하고 8개월 만에 난 1심 결과가 그렇다. 2000년 6월29일자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업주 정OO씨 5년 선고' 기사에는 "정 피고인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상죄 등을 적용,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화재당시 호프집 내에서 손님들을 제대로 대피시키지 않은 혐의로 호프집 관리사장 이OO 피고인에 대해선 징역 3년 6월을 확정했다. 그러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OO피고인(경찰)은 선고유예를, 양OO피고인(인테리어 기사)에 대해선 금고 1년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각각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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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인천 인현상가 화재현장에서 구조된 환자들이 중앙길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 /경인일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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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참사 희생자 친구 자리에 놓인 조화. /경인일보 아카이브

57명의 청춘이 목숨을 잃었는데, 넋을 기리고 추모하는 합동분향소조차 유족 뜻대로 차리지 못하는 일은 이 사고에서도 비슷했다. 11월 2일자 '난민수용소같은 합동분향소' 기사는 "1일 오전 중구 도원동 인천시 체육회 1층 합동분향소. 유가족들마다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식들을 먼저 보낸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이들의 넋을 위로할 분향소 하나 제대로 마련해 주지 않은 데 대한 분노였다. 당초 유족들은 실내체육관에 분향소를 만들어 줄 것을 인천시 측에 요구했다. 상황이 긴박한지라 일단 시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이곳에선 노동단체 주최로 '알뜰시장'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비좁은 2백평 규모의 인천시 체육회 1층을 분향소로 급조했다. 바닥엔 스티로폼을 대충 깔아 놓고 늦가을 밤추위를 달래기 위한 모포 2~3장만 덜렁 지급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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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동 호프집 화재현장에서 불을 끄고 있는 소방대원. /경인일보 아카이브

사고가 난 호프집은 10대 청소년을 공략한 불법 영업점으로 악명이 높았다. 11월 1일자 보도에서도 "유흥업소 80여개가 밀집한 이곳은 '10대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곳, 출입제한은 커녕 오히려 '삐끼'까지 동원해 호객행위를 하는 탓에 고교생은 물론 중학생까지 호프·소주방·카페, 당구장 등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날씨까지 쾌청하자 어린 학생들의 마음은 한껏 들떴다"고 당시 분위기를 취재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까 PC방·당구장을 전전하다 싫증나면 콜라테크나 호프집을 찾죠" 11월4일자 '문화공간 없어 유흥장 전전' 기사는 인천 청소년들이 여가시간을 건강하고 자유롭게 즐길만한 공간이 부재함을 꼬집었다. "청소년 1천1백7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보면 인천의 생활 문화공간에 대한 평가에서 '충분하다'고 답한 이가 고작 4.5%에 불과하다. 70%가량의 응답자가 '부족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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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중구 인현동 상가건물 화재현장을 방문한 최기선(가운데) 인천시장이 침통한 얼굴로 소방관계자로부터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경인일보 아카이브

인현동 화재참사가 2년이 지난 2001년 10월 25일자 '인현동 화재참사 그후 2년 스러진 넋…끝나지 않은 통한' 기사에도 책임회피에만 몰두하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인천시는 화재 당시 호프집에 있었던 학생들이 술에 취해 대형 유리창을 깨지 못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컸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이미 불이 난 업소에 폐쇄명령처분을 내렸고, 그 곳에서 학생들이 술을 마신 것 자체가 잘못인 만큼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가족이나 부상자 가족들은 당시 호프집 대형 유리창은 석고보드로 만든 합판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리창을 깨고 피신할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화재가 난 호프집이 폐쇄명령을 내리자 불법영업을 은폐하기 위해 유리창을 석고보드로 만든 합판으로 막고,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여러겹의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불법영업을 일삼고 있었는데도 사후 단속을 하지 않은 시의 책임이 크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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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화재 학생참사 대책위원회의 침묵시위. /경인일보 아카이브

건강하게 놀 공간조차 마련해주지 못한 어른의 책임을 망각한 채, '호프집'의 자극성만 부각시키는 행태. 그래서 경인일보는 참사 당시에는 '호프집 참사'를 사고의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1년 후인 2000년 10월 기획시리즈에선 '인현동 화재', 2년 후 2001년부터는 '인현동 화재참사'로 정의하며 사회적 참사임을 부각했다.

"참사 없는 나라, 원칙이 통하는 나라, 억울한 죽음이 없는 나라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편히 잠들라…." "이런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오늘 이 자리 모든 아비 어미들은 다짐한다…."

인현동 화재 참사 합동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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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참사 희생자 친구 자리에 놓인 조화. /경인일보 아카이브

그로부터 23년 후, 서울 이태원 한복판에서 축제를 즐기던 꽃 같은 청춘들이 스러졌다. 경인일보를 통해 생생하게 보도된 인현동 화재참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인현동'과 '이태원', 장소만 달라졌을 뿐 사고가 일어난 근본 원인과 부실한 사후 대책, 무엇보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한 우리의 비정한 시선은 달라진 게 없다. 애타게 부르짖는 아비 어미들의 목놓음만 메아리칠 뿐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