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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경남 일원에서 열린 '위더스제약 2023 천하장사 씨름대축제' 여자부 개인전 국화장사(70kg 이하)에 등극한 김은별(안산시청)이 황소트로피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3.11.15 /대한씨름협회제공
괜찮아. 잘했어!

1등만 기억되는 프로 스포츠계에서 성적이 어떻든 선량한 응원을 무한히 받는 선수가 있다. 여자 씨름계의 유일무이 막강한 팬덤 '금별단'은 김은별(28·안산시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제대로 한건지… 얼떨결 이룬 기분"

겸허하고 다부진 태도, 팬덤 부른 매력

'사이렌: 불의섬' 출연은 신의 한 수

"기술로 큰 사람 이기는 씨름에 반했죠"


매화급(60㎏ 이하)에서 활동하던 김은별은 최근 한 체급을 올려 출전한 '위더스제약 2023 천하장사 씨름대축제'에서 국화장사(70㎏ 이하)에 등극했다. 무한한 팬들의 지지에 더해 장사 타이틀까지 얻어 기세가 등등할 법도 하나, 우승 소감은 제법 독특했다. 매력이라면 매력일 수 있겠다.

"장사가 되면 마냥 기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 같아요.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거든요. 그동안 매화급에서 줄곧 활동했는데, 첫 장사 타이틀을 국화급에서 얻는 게 마음에 걸려요. '내 밥그릇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면서 얼떨결에 이룬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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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경남 일원에서 열린 '위더스제약 2023 천하장사 씨름대축제' 여자부 개인전 국화장사(70kg 이하)에 등극한 김은별(안산시청)이 직접 관람 온 팬클럽 '금별단'과 함께 우승을 만끽하고 있다. 2023.11.15 /김은별 선수 제공

냉정하게 말해, 앞서 김은별은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출전하는 민속씨름·민속리그 매화급에서는 단 한 번도 장사에 오르지 못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굵직한 시합에서 우승해본 적 없는 선수가 열성적인 팬덤을 가진 상황에 내심 의아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들려준 겸허하면서도 다부진 그의 답변에 이내 팔짱을 풀고 미소 짓게 됐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천하장사 대회가 끝났는데도 그는 "강박 같은 게 있는 건지 매일 하던 걸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우승 다음 날도 그냥 운동하며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며 내년 2월 치러질 설날씨름장사대회를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숱하게 매화장사 결정전에서 미끄러지던 게 뇌리에 강하게 남아서다. 그때마다 김은별은 먼 곳까지 따라와 힘을 북돋아 주는 팬들의 응원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에게 금별단은 어쩌면 장사 타이틀보다 더 값진 성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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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추석장시씨름대회에서 김은별(안산시청)의 팬이 직접 스케치북에 그린 응원 그림을 들고 선수를 응원하는 모습. 2023.9.12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인기몰이의 시초는 단연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출연 제의가 왔을 당시 홈그라운드인 안산에서 열릴 대회 준비기간과 맞물렸다. 하지만 고민 끝에 김은별은 "살면서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출연을 결심했다. 결과는 대성공. 자충수가 될법했던 선택은 묘수였던 셈이다.

김은별의 공식 팬클럽 금별단은 그렇게 탄생했다. 김은별과 금별단, 여자 씨름계에 등장한 이들의 끈끈한 연대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여자 씨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는 이들의 열정이 8할은 차지한다. 전국각지에서 펼쳐지는 대회를 오가며 씨름장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선수들끼리 이야기하는 게 경기장에 울릴 정도로 관중이 없던 시절도 이제 옛이야기다.

"솔직히 처음에는 제게 팬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어요. 얼떨떨하고 감개무량했죠. 씨름을 관람하려고 연차까지 쓰면서 오시는데, 고생시키는 것 같아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에요."

팬 입장에서 김은별은 '덕질할 맛'나게 해주는 선수다. '역조공'을 하며 커피나 텀블러를 팬에게 선물해주거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시합 때마다 반갑게 팬들을 맞아준다. 그는 "저도 선물과 편지를 매번 받으니깐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다"고 멋쩍게 웃으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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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위더스제약 2023 천하장사 씨름대축제'에서 국화장사에 올랐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훈련에 매진하는 김은별(안산시청). 휴식을 취할 때는 주로 베이킹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정확하게 계량하고 집중력을 발휘해 빵을 완성하는 과정이 즐겁다고 한다. /김은별 선수 제공

씨름 덕분에 든든한 팬들을 만났으나, 김은별은 중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태권도 선수였다. 그는 "어릴 때 태권도 선수를 했었지만 점차 흥미를 잃었다. 자연스레 훈련도 미루게 되다 보니 아예 마음을 접었다"며 "공백기를 보내던 중 어머니의 권유로 씨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아마추어 대회를 종종 나가다가 2018년에 입단 제의를 받으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씨름 실력이 부쩍 늘기 시작한 건 지난 2020년 김기백 안산시청 코치의 스카웃으로 현재 팀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김은별은 "씨름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왜소하고 삐쩍 말랐었다. 작은 체구였는데도 불구하고, 차츰 훈련하면서 큰 사람을 기술을 사용해 이기게 되니 쾌감을 맛보게 됐다"며 "요즘에는 들배지기 기술을 잘하고 싶어 더욱 신경 써서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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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중하는 김은별(안산시청)의 모습. 최근 국화급 출전을 위해 몸무게를 4㎏ 증량하고, 바벨 무게도 부쩍 올려 훈련했다고 한다. /김은별 선수 제공

불꽃 튀는 승부욕, 든든한 팬, 그리고 장사 타이틀. 삼박자를 두루 갖춘 김은별은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자주 들릴수록 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게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잠시 말을 멈추고 긴 고민을 이어가던 그는 먼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던 선수. '저 사람 한다더니 진짜 해냈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달까요. 지금 제 모습이 어떻든 늘 응원해주는 팬들이 계세요. 이렇게 서로 좋은 시기를 보내고, 훗날 책장 속 오래 간직한 책을 꺼내 읽듯 현재를 즐거웠던 추억으로 떠올렸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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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웨이트 트레이닝이 끝나면, 안산시청 씨름단 동료들과 연습 게임을 진행한다. /김은별 선수 제공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