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극장가가 한국영화 한편으로 훈풍이 불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입소문을 타면서다.
SF, 액션 등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닌 ‘시대극’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건 “총이 있다면 쏴서 죽이고 싶었다”는 살벌한(?) 관람평이 말해주듯 치가 떨릴 만큼 사실적인 배우들의 연기가 엄청난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12·12사태가 일어난 그날 밤을 다뤘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우리 사회를 후퇴시킨 현대사의 비극이다. 12·12사태를 시발점으로, 5·18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 죄없는 이들이 독재에 스러져 간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각색된 영화지만, 영화 역시 때론 역사를 기록하는 수단이다. 1979년 12월 12일 이후 40년도 넘게 흐른 지금 이 시점에,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을 지금의 청춘들까지 영화에 열광하는 데는 어쩌면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역사가 현재에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불안 탓일 지 모른다.
이번주 레트로K는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온 독자를 위해, 단죄의 역사를 찾아봤다.
1995년 12월 1일자 ‘전·노씨 신군부 군사반란 입증 주력’ 기사는 검찰이 1995년 11월 30일 12·12 재수사를 발표한 배경과 향후 전망을 설명했다.
검찰의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가 착수됐다. 검찰의 이번 재수사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쿠데타의 주역들에 대해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뜻이며 5·18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검찰이 정치권보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앞서 12·12 관련자들에게는 기소유예로, 5·18사건에 대해서는 공소권없음 결정으로 면죄부를 준 적이 있어 이전의 검찰결정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결과를 빚게 됐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30일 12·12 및 5·18 특별수사부 설치를 발표하면서 “검찰은 12·12사건 관련자들의 처벌을 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며…
검찰은 지난해 10월 수사발표에서 “12·12사건은 군부소장파의 리더인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 계획하에 군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병력을 불법 동원해 군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반란”이라고 설명했다.
재수사를 결정한 검찰은 발표 다음날인 1일 전두환을 소환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바로 전두환은 검찰 소환에 불응하면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12월2일자 ‘전씨 소환사태’ 기사에는 ‘전두환씨 대국민담화’ 전문을 실었는데, 그는 재수사를 현 정권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부당한 수사라고 주장했다. 특히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으로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검찰의 재수사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국민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이미 지난 13대국회의 청문회와 장기간의 검찰수사과정을 통해 12·12, 5·17, 5·18 등의 사건과 관련하여 제가 할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을 한 바 있고 검찰도 이에 의거하여 적법절차에 따라 수사를 종결한 바 있습니다’
재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소환에 불응하며 버티는 전두환을 향해 검찰은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을 전격 구속해 안양교도소에 수감했다. 1995년 12월 4일자 사설 ‘진상 가려내 정의의 심판을’이 실렸다.
노태우씨에 이어 전두환씨가 3일 전격적으로 구속수감된 것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을 가지면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소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12·12와 5·18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동일선상의 연속적 군사반란이었듯 전정권과 노정권은 5·16으로 태어난 첫 군사정권의 쌍생아였다.
전씨의 구속으로 5·18 정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검찰 소환을 받은 전씨는 2일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의 성명을 내어 전국민을 우롱하고 수감후에도 “답변서외에 할말이 없다”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실정법의 심판을 받은 연후라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전두환의 구속 소식이 알려지며 전세계 언론도 주목했다. 언론통제로 국내에선 폭도로 둔갑된 5·18 민주화운동 진실이 독일 언론 등 서구 언론에서 먼저 알려졌고 뒤늦게 국내로 소식이 퍼지면서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시작됐다. 이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의 최후를 바라보는 세계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특히 AFP통신은 전씨의 인물을 별도의 기사로 다루면서 “독재자 전두환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유혈적인 역사의 장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로이터통신도 전두환씨 구속수감 보도와 함께 지난 80년 광주학살과 관련된 당시의 주요사건 일지를 보도했다.
홍콩의 최대 석간신문 성도만보(星島晩報)는 3일 전씨이 체포사실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별도로 게재한 장문의 자체 분석기사에서 “전씨는 광주사태에 진 피의 부채를 갚아야만 한다”면서 “현재의 상황으로 볼때 민중의 압력때문에 그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1면 머리 기사 제목을 “광주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의 원흉은 누구냐? 역사에 깨끗한 페이지를 돌려달라”고 뽑았다.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법의 심판대 위에 섰다. 1996년 8월 26일 1심 재판에서 전두환은 내란 및 군사 반란 등을 모두 유죄로 인정받아 사형이 선고됐고 노태우는 징역 22년6개월이 선고됐다.
1996년 8월26일자 경인일보는 검은색 바탕 위 ‘전두환 사형’ 다섯글자만 쓴 1면 헤드라인을 걸었다.
“‘합법 가장한 반란’ 후대에 물려줄 수 없다” 시대적 소명 반영
재판부는 이와 관련, 군부에서조차 하극상의 극치라는 거센 비난을 받아온 12·12사건과 지난 80년 혼란 시국상황을 빌미로 극소수 정치군인들이 만든 집권 시나리오의 의해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 일정이 좌절되는 과정을 조목조목 짚었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관련해 재판부는 수사 주체인 검찰과 정치권의 입장을 배제한채 사법적 단죄를 염원해온 일반국민의 여론과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보다 준엄하게 심판할 후세들을 깊이 염두에 두었다.
한국 현대사가 이룩해야 할 민주화과제에 커다란 장애로 인식돼온 군부정권의 과거사가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되며 후세들에게 결코 불법행위를 합법으로 가장한 유산으로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시대적 소명을 반영한 것이다.
비록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치며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됐고 수감생활을 채 1년도 하지 않은 채 국민대통합을 이유로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돼 풀려났다. 또 수천억원대 추징금을 징수토록 했지만 전두환은 추징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다. 5·18에 대해 단 한번도 사죄하지 않았고 2021년 1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비극의 역사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