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7)] 김경은 소설가 - 김영하 장편소설 '검은 꽃'

입력 2023-12-04 19:15 수정 2023-12-04 19:44
지면 아이콘 지면 2023-12-05 10면

정주하지 못한 이민자들의 기록

당시 이민선 '북적거리는 국제도시'
새출발 꿈꾸며 전국서 사람 몰려
'애니깽' 노동환경은 채찍질 난무
신체적 속박 벗어나기 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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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검은 꽃
검은 꽃.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428쪽. 2020년 10월 20일(2003년 作)
이정의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은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제물포', 좀 더 정확히는 제물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지구 반대편, 주인 잃은 고대 마야문명의 요새에서 생을 마감하는 그에게 주마등처럼 흘러가던 곳이 하필 제물포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883년 개항 이후 제물포의 풍경은 조선의 정세만큼이나 급격히 변화했다. 초가집 몇 채뿐이던 해안가에는 속속 건물이 채워지고 곳곳에 서구식 건물도 세워진다.



일본은 개항 전에 이미 영사관을 설치했고 1884년 현재의 중구청 자리로 건물을 이전했다. 영국도 1884년 영사관 건물을 지었으며(2007년까지 올림포스 호텔이 있던 자리에 있었음) 중국과 러시아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또 일본우선회사는 나가사키와 인천 사이의 정기항로 운항을 위해 1883년 설치한 지점을 현재의 위치인 인천아트플랫폼 자리(당시에는 해안선에 가까웠으나 건물 남쪽은 매립된다)로 옮겨 신축했다.

서울의 관문으로 변하면서 제물포에는 1885년 접안시설이 구축되고,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하룻밤 묵어가야 했으므로, 대불호텔을 비롯한 숙박업소들이 세워진다. 1880년대 응봉산에는 각국공원이 조성되고 독일 기업이던 세창양행의 사택(현 맥아더 동상 자리)과 외국인 사교클럽이던 제물포구락부도 들어섰다.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로는 해안가에서 멈췄으며, 1905년에는 전해에 업무를 시작한 인천측후소가 응봉산 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전소된 존스턴 별장이 같은 해, 현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자리에 완공되기도 한다.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호가 떠나던 1905년 3월의 제물포항은 이처럼 북적거리는 국제도시였다. 지금도 그곳 어디쯤인가에 서면 당시를 상상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길은 습관이었고 습관은 자연이 생성한 지형 위에서 생물이 인식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깡그리 없애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사라지기 힘들고, 청·일 조계지가 마주한 응봉산 자락의 거리는 그래서 지금도 거기 남아 있다.

부두의 접안지에서 상륙하면 길은 청나라와 일본의 영토를 가르던 경계지역으로 이어진다. 외교사절부터 여행자,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주하는 일본인까지, '한적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제물포는 이들의 왕래에 따라 번성하기 시작했다.

초립에 도포자락 날리는 행인부터 바지저고리 차림에 지게로 짐을 나르는 두건 동여맨 장정들, 치마에 허리끈 질끈 묶고 함지에 담아온 요깃거리를 파는 아낙하며, 양장 차림의 서양인과 기모노 입고 걸어가는 여인들이 한 프레임 안에 잡히는 이국적 풍경을 그려내곤 했다.

어깨에 짐을 둘러메고 일하는 아이들에 걸인, 야바위꾼, 하릴없는 남녀노소 구경꾼까지 가세해 여기저기서 소란한 웃음이 터지면 거리는 온당하거나 불온한 분위기가 뒤섞여 생동했다.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 제물포항 주위를 포착한 엽서와 사진에 담긴 모습이다.

그 거리 '중국인과 일본인의 거류지를 지나 번듯한 2층 건물'에 대륙식민회사가 차린 사무실에는, 새 출발을 꿈꾸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중인 신부, 옥니박이 박수무당, 몰락한 황족 소녀와 굶주린 제대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 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입부의 첫 문단은 이역만리에서 죽어가는 찰나, 함께 떠난 사람들이 이정에게 호출되는 장면이다.

그들은 이정까지 포함해 모두 제물포로 모였다. 1905년 3월 6일 출발한 일포드호에 실려 5월 15일, 멕시코 살리나 크루스항에 도착한 인원은 1천30여 명이었다. 이민자들은 4년 계약을 맺고 출발해 유카탄반도의 에네켄(henequen) 농장 22곳에 분산된다(박영미, '하와이 한인이민과 비교한 맥시코 초기 한인 이민과정에 대한 고찰', 2002).

선인장 용설란의 일종인 에네켄은 선박 로프의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우리에게 '애니깽'(김상열의 1988년 희곡과 1990년 김선영이 쓴 소설의 제목이며 김선영의 소설은 동명의 표제로 영화화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외국자본가와 대지주가 장악한 멕시코 농장의 노동환경은 지주의 전횡 아래 채찍질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하와이 이민이 미국 외교관과 선교사의 지시를 동서개발주식회사에서 실행한 것이라면, 에네켄을 재배하는 멕시코의 경우 국제이민 브로커의 지시를 일본 대륙식민회사에서 추진한 것이었다(박영미, 같은 논문).

하와이 이민자들이 3년이라는 계약 기간 뒤 자유노동 이민으로 풀려난 것과 달리 멕시코의 경우 신체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가시 박힌 에네켄 작업의 열악한 환경이 소문나면서 기왕의 중국과 일본 이민자 모집이 어려운 데다 하와이를 거울삼아 가족이민을 추진한 결과라는 불법사기 프로젝트였다. 이는 부의 축적과 신분 상승이 가능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정체성까지 확립한 하와이 이민과 달리 단발로 그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난리에 부모를 잃은 이정은 보부상에 채여 떠돌다가 도망친 뒤, 성공을 꿈꾸며 이민선에 올랐다. 그가 아는 성공의 모델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농장을 탈출해 국경이라 짐작되는 곳을 향해 몇 년을 내달렸다.

그 사이, 남의 나라 혁명에 용병으로도 활약하면서 국가를 고민했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고자' 주인이 사라진 고대국가의 터에서 함께 이민 왔던 몇몇과 잠시 유토피아를 누려보기도 한다. 결국 그가 정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의미다.

정부군에 쫓겨 최후를 맞이하는 그의 눈앞으로 나타나는 일포드호 동승자들은 한배를 탄 운명이었다. 형해를 찾을 수 없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출발지 제물포에, 구천을 떠도는 이들 이민자는 모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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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재단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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