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8)] 양진채 소설가 - 조혁신 소설집 '뒤집기 한판'

입력 2023-12-06 19:01 수정 2023-12-06 19:06
지면 아이콘 지면 2023-12-07 10면

노을 지면 동화속 나라같은 '부처산 똥8번지' 

 

가슴 한편 찡해지다 무릎을 치고
작가 찰진 비유 고개 끄덕이기도
가식 없이 척박하고 야박한 모습
진저리 나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져


2023120701000119100006983

뒤집기 한판
뒤집기 한판. 조혁신 지음. 미디어밥 펴냄. 224쪽. 2023년 09월 20일(2007년 作)
아침 산책길, 마른 낙엽이 바람에 뒤척인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도 전에 떨어져버리듯 가을은 그렇게 가버렸다. 과일가게 옆에 군고구마 통이 보인다.

지난밤 밤하늘에 내내 고구마 굽는 연기를 흘려보냈을까. 고구마 냄새는 고향 같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말을 불러온다. 추억도 덩달아 따라온다. 어려서 살던 집은 아직 남아 있을까. 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친구는, 그 동네 재개발 소식을 들었는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문득 조혁신 소설가의 '뒤집기 한판'이 떠오른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1970~80년대에 헐벗고, 구차하고, 그악스럽게 버티며 살아야 했던 삶도 지나고 보니, 아랫목 눌러붙은 검붉은 장판, 그 자리에 아버지 밥이 식을까봐 이불을 덮어 넣어놨던 아버지 밥그릇처럼 그립고 따뜻하다.

'뒤집기 한판'은 소설집이다. '부처산 똥8번지'를 필두로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읽다보면 가슴 한 편이 찡해지다가도 무릎을 치는 구석이 있는가 하면, 작가의 유려하고 찰진 비유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소설이 재미있다. 2007년에 출간됐던 소설인데 얼마 전 출판사를 달리해 다시 발간되었다.

소설은 대부분 연작소설로 주 무대는 송림동 부처산 똥8번지이다. 부처산 똥8번지라는 말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그 시절을 지나왔거나 인천에서 꽤 오래 산 사람일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왜 거칠고 방자하고 만만하게 '똥'자를 붙였을까. 나무판자를 댄 '변소'에 탑처럼 쌓인 똥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 살았기 때문일까.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쓸데없는 공상을 하게 되는데 자주 그런다.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환기'로, 지나온 삶을 다시 복기하게 한다.

소설을 읽다가 송림동 산8번지를 찾아가면 당진 방앗간, 영미 이발관, 거북오락실, 송림식당, 송림슈퍼, 송림복덕방을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멀리서 "똥 퍼! 퍼어"하는 한동팔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든다.

그뿐인가. 그 비슷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당장 소설 속 인물 중 누군가에게 이입된다. 소나무를 찾아다니는 갑수와 일남이를, 한기준 씨를, 영미이발관 구만길 씨를, 구청 직원부터 복덕방 영감, 옆집 슈퍼 아줌마, 옆방 순희 엄마, 한동팔, 그리고 마주치고 싶진 않지만 꼭 마주칠만한 속물 유지 고광해까지 다 만날 듯 생생하다.

소설 속에 펼쳐진 삶의 모습이 가식 없이, 위장 없이, 환상 없이 척박하고 야박하고 적나라하게 날 것 그대로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삶이 진저리쳐지기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대낮에 보면 그렇게 지저분하고 우스워 보이던 산동네의 슬레이트 지붕들이 놀이 지는 저녁에는 동화 속 나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황혼은 천대받고 가난살이에 찌든 부처산 사람들의 치부를 낱낱이 숨겨주었'던 노을 같은 온기. 아파트 숲, 더 넓은 집이지만 각자도생하는 가족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사람 간의 온기가 소설 속에 흐르기 때문이다.

인천에 오래 산 사람들은 송림동이 어떤 동네인지 잘 안다. 특히 송림동 산8번지에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언덕 중턱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가건물의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면 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집은 몸만 누울 수 있는 공간이면 되었다.

또 그 이후에는 지방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장 일자리가 많은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송림동에 몰려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동네와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지금은 그 골목, 그 집들 자리를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생활풍습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에 박제되어 있을 뿐.

이번에 다시 읽은 소설에서 되씹은 문장은 "뒤집기 한판이란 것이 있잖냐. 아무리 덩치 큰 놈이 짓눌러도 단숨에 뒤집어 내다꽂는. 언젠가 한 번은 무겁게 짓누르는 이 세상을 반드시 한판거리로 뒤집을 날이 있을 것이다"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한판 내다꽂아 뒤집고 싶은 때문일까.

2023120701000119100006982
인천문화재단 CI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