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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거치게 되면 보통 16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개인 사정에 따라 교육 기간이 짧을 수도, 더 길어질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시험에 나오는 것만 배우거나 해당 분야에서 요구되는 교육만 받았을 뿐 정작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라든지 인생을 풍요롭게 할 근원적인 물음들과는 무관한 과정들만을 이수하게 된다. 사람들이 종교 서적을 탐독하고 철학서를 뒤적이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채워지지 않은 근원적인 의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이가 쇼펜하우어나 톨스토이 '인생론' 같은 책들이다.

쇼펜하우어는 학문이나 이론으로서의 철학보다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한 진짜 철학자다. 칸트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주저를 남겼으나 철학분야에서보다는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서재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어둘 정도였고, 바그너·토마스 하디·프루스트·말러·사무엘 베케트·보르헤스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도 자신은 쇼펜하우어를 심리학으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말했을 정도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이른바 한국의 동경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데칸쇼'라고 하여 칸트, 데카르트, 쇼펜하우어가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쇼펜하우어는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서 힌두교와 불교 등 인도 철학에 깊은 이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심금을 울리는 잠언들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쇼펜하우어 정도는 읽어야 한다.

요즘 한국 정치의 쟁점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논란과 묻지마식 정치 테러 그리고 신당 소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쇼펜하우어가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발언의 당사자는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으로 "제가 쇼펜하우어를 말하면 내일쯤 또 '쇼펜하우어는 누구에 비유한 거냐' 이렇게 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쇼펜하우어를 거론했다. 한국정치인들의 인문 교양과 상식에 실망이 큰 국민들의 입장에서 김 비대위원의 쇼펜하우어 언급은 신선한 충격이었는 바, 이번을 계기로 한국정치인들이 스스로 품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