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호위 '변방의 검푸른 전사'
파검 깃발 아래 일당백 화력 자랑
부당하게 흔드는 외풍 막아주고
패배의 기억에는 망각제도 공급

구단-팬, 팔 길이만큼 거리 필요
동행하되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피치위 축구공보다 존경이 우선
패자를 존중할 줄 알아야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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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복 前 인천시 정무부시장
노를 저어 바다로 가자/ 핏빛 파도 속을 헤쳐 나가며/ 꿈을 꾸나 깨어 있으나/ 닻을 내릴 수 없다.

어느 시인의 노래가 아니다. 북 콘서트에 온 착각과 흥분을 일으키는 인천유나이티드 FC 서포터스 연합 파검(파랑·검정)의 응원가 '뱃놀이 가자'의 가사다. 작사 미상인 이 서포팅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천축구전용구장에는 선수들을 지키는 변방의 검푸른 전사들이 있다. 지축을 뒤흔드는 젊은 서포터들이다. 그들은 피치(Pitch·경기장)를 에워싼 자생적인 아웃사이더다. 파검의 깃발 아래 일당백의 화력을 자랑하는 대여섯의 독립 서포터스 그룹들이 뒤엉켜 포효한다. 그들의 응원가에 자주 등장하는 서해, 미추홀, 검푸른 바다, 서쪽 끝 도시의 사람들, 인천은 나의 자존심 등의 단어들은 인천의 정체성인 개방성과 변방성을 압축한 특산품들이다. 다급할 때 외치는 "할 수 있어 인천! 정신 차려 인천!" 같은 구호들도 흡사 300만 인천시민을 향해 서울 일극에 주눅들지 말고 정면 도전하라는 독전(督戰) 같기도 하다.

축구장에 다니는 사이 내 생활에도 루틴이 생겼다. 목 운동도 열두 번씩 하고 양치질도 열두 번씩 세면서 한다. 열두 번째 선수인 서포터스 때문이다. 홈경기가 있는 날은 평양옥에 들러 대한민국 최고의 해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프로축구는 팬들의 함성을 먹고 산다고 하지만 선수들은 서포터스의 간절함을 먹고 산다. 선수들이 경기 내내 한결같은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경기력은 발끝에서 나오지만 집중력은 머리의 감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터빈을 돌려 나오는 에너지가 집중력이다. 그래서 한 골 이기고 있을 때보다 두 골 이기고 있을 때가 더 위태롭다. 경기 종료 십분 안짝으로는 아예 간절함이 최상의 전략이 되기도 한다.

나는 서포터스를 우리말로 '모루'라고 하면 좋겠다.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두드리는 망치는 축구선수고 그 밑을 받쳐주는 쇳덩이 모루는 서포터스다. 좋은 망치와 든든한 모루가 있는 대장간에서 진검(眞劍)이 나온다. 그래서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캉(Caen)전투를 '망치와 모루의 전술'이라고 한다. 서포터스의 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때때로 구단이나 선수들을 부당하게 흔드는 외풍을 막아주기도 하고 패배의 기억을 안고 뛰는 선수들에게는 망각제도 공급하며 겁 없이 덤비는 상대의 허슬을 잠재우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이라 불리는 소설가 위화(余華)의 말처럼 중국이 축구를 못하는 이유가 부정부패 때문이라던데 우리 주변은 어떤지 이를 관리하는 프런트들의 차부다(差不多)도 지켜본다.

선수단에게 전술이 있다면 서포터스에게는 길이 있다. 서포터스 개개인으로 보면 축구를 즐기는 나만의 방편일 뿐 거기에 무슨 길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겸손한 오해다. 일단 모이면 집단이고, 집단에는 좋든 싫든 함께 가는 길이 생긴다. 그 길이 바로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본질을 깨닫는 성질인데 어떤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해주는 특별함이다. 성실함도 재능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축구선수에게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말은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딱히 특별함이 없는 선수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서포터스도 마찬가지다. 인천유나이티드 서포터스는 빅클럽 서포터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열성적이고 데시벨은 높다는 말도 마냥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특별함이 빠진 위로(慰勞)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인천유나이티드 서포터스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자존감이다. 서포터스의 자존감은 독립성에서 나온다. 구단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래서 구단과 서포터스 사이에는 늘 선의의 긴장감이 필요하다. 서포터스는 간절함의 공급자이고 그 공급자는 독립적이어야 공정하다. 구단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시작돼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예술체육단체 지원 정책이 됐던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필요하다. 구단과 서포터스는 늘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동행하되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서포터스의 개방성은 중요하다. 인천 자체가 인천합중시(仁川合衆市)라고 할 만큼 이미 유나이티드 도시다. 개방성은 태도나 생각이 배타적이지 않고 열려 있는 상태의 성질이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라도 조롱하지 않는 성질이다. 결국 개방성은 존경(Respect)이 그 바탕이다. 그래서 일단 피치 위에 서면 존경이 축구공보다 우선이다. 축구는 게임이 아니라 전쟁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전쟁의 승자는 패자를 조롱하지 않는다. 패자도 친구이고 '그 친구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패자를 존중할 줄 알아야 최후의 승자가 된다. 요즘 울산 서포터스가 하는 '잘 가세요' 응원은 패자를 향한 조롱이지 승자의 경외(敬畏)로 들리지 않는다.

파검이 부르는 '인천사람들' 가사 또한 서포터스의 숙명인 인천의 변방성이다.

서쪽 끝 도시의 사람들/ 세상은 거칠다 말하지/ 하지만 최고의 석양과/ 낭만과 꿈들을 가졌다네. 그래서 가히 인천의 개방성과 변방성은 파검의 정체성과 일치한다.

최근 축구장 밖의 또 다른 서포터스인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만들어 발표한 음원(音源) '인천가자' '인천의 파도여' '해안동' 등도 청라·부평·주안·송도를 관통하는 인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시민 서포팅이다.

서포터스의 플래그나 배너는 상징을 넘어 품격이다. 그래서 바탕이 어진 인천 서포터스에게 고전 스토리텔링 하나 선물하고 싶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의 대에 와서 동으로는 제나라한테 패해서 맏아들이 죽고 서로는 진나라한테 땅을 7백리나 뺏기고 남으로는 초나라한테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땅은 백리만 있어도 왕 노릇을 할 수 있지요.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깎아 주면 백성들이 곡식을 잘 가꾸고 젊은이들은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배워 부모와 형제를 섬기고 밖으로는 웃어른들을 섬기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된 뒤라면 몽둥이로도 진나라와 초나라의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를 부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왕께서는 이를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온 날보다 내일이 더 긴 인천유나이티드 서포터스가 '인자무적(仁者無敵)' 깃발을 들면 정조 이산의 자서(自序)를 원용(援用)한 수원FC의 걸개 '만천명월 주인수원(萬川明月 主人水原)'이나 '견성이갑 세여파죽(堅城利甲 勢如破竹)'을 내건 대구FC 친구들과 함께 올해는 울산·전북도 부술 수 있지 않을까.

곧 2024 K리그 전쟁이 터진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 국가대표들도 응원하자. 경기장을 나설 때 목소리가 쉬지 않으면 부끄럽다.

/박영복 前 인천시 정무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