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의 싸움 ‘1형 당뇨’… 경제적 여유도 일상 균열 막지 못하는 이유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1-2)]

입력 2024-05-05 17:04 수정 2024-07-23 17:34
기자들의 기억법-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

‘시간 빈곤’

누구에게나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인데, 일할 때를 제외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자유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보통 돈이 있고 없고를 두고 빈곤하거나 풍요로움을 따지는데 시간에도 비슷한 개념을 적용한 것이죠.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준서의 어머니를 만나며 우리가 깨달은 점은 가족 간병이라는 굴레에서는 중산층도 ‘시간 빈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산층에게는 ‘경제적 여유’라는 막강한 조건이 있긴 하나, 시간에 있어선 이들 역시 불평등하게 흘러갑니다. 가족 간병을 하지 않는 보통사람들과 비교해서 말이죠.

준서의 어머니이자 간병자,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가 자신에게 주어진 간병의 조건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가족 간병과 일상의 공존을 부단히 지켜내고 있지만, 그의 삶은 어딘가 여유가 없고 숨이 차 보였습니다.

준서(가명·12)가 1형 당뇨로 처음 쓰러진 이후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일상도 분주해졌다. 혈당 작용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음식물에 대한 정보를 직접 공부하며 1형당뇨에 대응해갔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준서(가명·12)가 1형 당뇨로 처음 쓰러진 이후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일상도 분주해졌다. 혈당 작용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음식물에 대한 정보를 직접 공부하며 1형당뇨에 대응해갔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지난달 27일 경인일보 취재진은 고양시 일산동구의 김은희씨 자택에 방문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언론 등을 통해 으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 간병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저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집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준서는 여느 초등학생들의 모습과 똑같았고,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러 잠시 나왔다가 다시 영어 공부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차츰 김은희씨의 삶이 고요 속 곧이어 몰아칠 태풍처럼 다가왔습니다. 김은희씨는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5분에 한 번씩 스마트폰 속 차트를 확인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멀티태스킹을 하듯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심상치 않다 싶으면 서슴없이 준서에게로 가 ‘무언가’를 먹으라고 말한 뒤 다시 인터뷰 중인 식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무언가는 혈당을 곧바로 높이는 데 탁월한 오렌지 주스였습니다.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와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아들 준서(가명·12)가 사용하는 스마트 워치와 핸드폰 속 혈당 차트. 주사요법을 사용할 때 사용한 ‘r’, ‘n’을 기록한 공책이 뒤편에 놓여 있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와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아들 준서(가명·12)가 사용하는 스마트 워치와 핸드폰 속 혈당 차트. 주사요법을 사용할 때 사용한 ‘r’, ‘n’을 기록한 공책이 뒤편에 놓여 있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만히 지켜보니, 마치 한치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을 가정하듯 오차없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짜인 김은희씨의 일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김은희씨는 매순간 준서의 혈당과 사투 중이었는데 마치 기계처럼 1분 1초의 공백 없이 효율적으로, 정확하게만 움직여야 했습니다.

널찍한 거실과 주방에는 5분마다 갱신되는 혈당 차트를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 공기계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주방과 옷방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는 트레시바와 글루카곤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노트북 화면에는 준서의 혈당 등 건강 정보를 축적한 데이터베이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습니다.

준서(가명·12)가 처음 주사요법으로 인슐린을 주입할 당시 썼던 기록 노트. 아침과 저녁, r과 n으로 나뉜 인슐린의 양을 정확하게 기록해뒀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준서(가명·12)가 처음 주사요법으로 인슐린을 주입할 당시 썼던 기록 노트. 아침과 저녁, r과 n으로 나뉜 인슐린의 양을 정확하게 기록해뒀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남부러울 것 없는 학벌과 직장, 한 달 1천만원가량인 수입. 김은희씨를 둘러싼 외적인 조건들이 그가 경제적으로 중상위 계층임을 말해줬습니다. 이 점을 김은희씨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희귀병을 간병하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로 ‘넉넉함’을 꼽았으니 말이죠.

그러면서도 가족 간병 때문에 일상을 포기한 채 고군분투하는 환우와 그 가족들을 염두에 둔 듯 “소득과 지식과 이런 모든 게 1형 당뇨 간병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 같아요. 기회에 따라서 아이를 관리하는 게 엄청나게 차이가 나거든요. 저희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경우에는 굉장히 정보 격차가 심한 거죠. 저번에 TV에서 애 아빠 혼자서 혈당 관리하기가 너무 벅차서 나중에는 아이가 쓰러진 장면을 봤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라며 왠지 모를 미안함까지도 내비쳤습니다.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 자택 옷방에 있는 인슐린 냉장고의 모습. 비상시에 대비해 관련 약품들을 비축해뒀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 자택 옷방에 있는 인슐린 냉장고의 모습. 비상시에 대비해 관련 약품들을 비축해뒀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그도 그럴 것이 실제 지난 1월 충남 태안에서 1형 당뇨를 앓는 8세 자녀와 부모가 동반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수개월간 병원 치료비 부담과 혈당 관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1형 당뇨 간병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정부 차원의 지원 강화에 대한 논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죠.

지난해 2월 한국1형당뇨병환우회에서 실시한 1형 당뇨 간병 실태 자료를 보면, 앞선 비극의 사회적인 원인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응답에는 1형 당뇨병 환자와 환자의 가족 1천51명이 참여했습니다.

설문조사1

1형 당뇨는 중증 난치성 질환입니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병이라, 지속적으로 ‘혈당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건 결국 ‘경제적 부담’이 이 병을 간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인 셈입니다. 아울러 ‘혁신적인 의료기기의 늦은 국내 도입’에 대한 응답이 높은 데는 준서의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준서가 주사의 공포에서 벗어나 최신 의료기기로 보다 원활하게 혈당을 관리할 수 있었던 데는 최신 의료기기가 출시됐다는 정보에 접근할만한 환경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죠. 이런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간병가족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김은희씨 사례를 통해 우리는 ‘가족 간병vs일상’이 아닌, ‘가족 간병―일상’이라는 명제를 성립하게 하는 필요조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족 간병과 일상이 서로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말이죠. 영어로 된 해외 의료사이트를 해석해 1형 당뇨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우위력’, 언제든 준서에게 달려가 줄 친정어머니가 있는 ‘돌봄 인력’, 그리고 가감 없이 의료비를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김은희씨의 가족이 가족 간병을 하고 있음에도 일반 가정처럼 외형적인 완벽함을 유지하는 이유였습니다.

‘가족 간병―일상’과 필요조건

특히 ‘경제적인 여유’과 ‘돌봄 인력’은 가족 간병을 위한 핵심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7월 한국리서치가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간병이 필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 - 간병에 대한 인식 조사’를 보면 상당수 시민들도 이에 동의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런 요소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설문조사2

경제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긍정하면서도, 경제적 준비는 충분히 되지 않은 현실. 두 질문에 대한 답변 사이에 벌어진 간극은 환자의 가족들이 간병을 도맡게되는 ‘돌봄 인력’ 부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설문조사3

서로 상관 없는 듯 보이는 세 질문이 누군가의 삶에 한꺼번에 쏟아진다면, 아마도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릴겁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져 가족 간병을 해야하는 상황은 대개 예측 불가능할 때 찾아오는데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가족말고는 아픈 사람을 돌봐줄 수 없다면, 그때 우리의 일상은 더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정상가족’에 해당하는 김은희씨의 일상에 가정해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 3가지 필요조건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김은희씨의 삶도 분명 삐그덕거릴 겁니다. 만약 친정어머니라는 ‘돌봄 인력’ 즉, 가족 도움이 없다면 남편과 김은희씨 중 한 명은 직장을 그만두고 준서를 옆에서 돌봐야 합니다.

준서(가명·12)의 혈당 데이터 및 건강 정보에 대한 기록이 담긴 사이트.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준서(가명·12)의 혈당 데이터 및 건강 정보에 대한 기록이 담긴 사이트.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둘 중 하나 일을 그만둔다면 최신 기기를 구입하는 등 의료비에 쏟을 비용도 자연스레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수입이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필요조건인 ‘경제적인 여유’가 사라집니다. 이래저래 딜레마를 마주하는 셈이죠. 한치라도 어긋났을 때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대비하며, 현재 김은희씨는 ‘시간 빈곤자’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핸드폰 속에 담긴 준서(가명·12)의 혈당 등 건강 정보. 5분에 한 번 씩 업데이트되는 차트를 체크하며 혈당을 관리하고 있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핸드폰 속에 담긴 준서(가명·12)의 혈당 등 건강 정보. 5분에 한 번 씩 업데이트되는 차트를 체크하며 혈당을 관리하고 있다. 2024.4.27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결국 가족 간병을 도맡은 사람이 ‘시간 빈곤자’가 되고 마는 사회. 이런 사회가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경기도 내 가족 돌봄 문제의 쟁점과 대안을 연구했던 김정훈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인이 좋은 삶과 자기 행복권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자기 행복권을 추구한다는 건 시공간이 같이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시간 빈곤은 결국 ‘시간 결핍’을 뜻하는 거죠. 가족 간병을 하는 동안 그 시간을 이제 잃어버린달까요. 가족 간병 즉, 돌봄 이외의 시간에 대해 자기가 계획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돌봄을 선택하는 순간 이 계획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조금 복잡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1형 당뇨를 앓는 아들 준서를 돌보고 있는 김은희씨의 일상은 정말 무사한가요. 한국 사회, 가족 간병, 오차 없는 시간…. 무수한 전제를 떠올리면서 답변을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준서(가명·12)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인슐린 펌프. 인슐린 펌프를 찬 뒤로 준서는 ‘주사 바늘의 공포’에서 해방됐다. /김은희씨 제공

준서(가명·12)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인슐린 펌프. 인슐린 펌프를 찬 뒤로 준서는 ‘주사 바늘의 공포’에서 해방됐다. /김은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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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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