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

“사회적 책임 n분의 1 어때요?”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4-2)]

입력 2024-05-25 12:09 수정 2024-06-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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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민간-공동체 3개 조화 필요

간병서비스·돌봄휴가 실효 부실

“부모님 아닌 사회약자 돌볼 뿐”

일상 지켜줄 완충지대 풍성해지길

#진짜 선택을 위한 ‘완충지대’

이제야 본격적으로 간병할 자유를 바탕으로 정책과 제도를 논해볼 수 있습니다. 가족 중심의 간병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진정한 선택권을 보장하는 건 사회 시스템, 즉 앞서 설명했던 든든한 ‘완충지대’입니다. 간병할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죠.

핵심은 3가지입니다. 이 완충지대를 일구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 국가적 차원, 그리고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민간 차원의 실마리는 박성자 상임이사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달 24일 서울시 강남구 승일희망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성자 상임이사는 제도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방향을 보여줬습니다.

이 방향성은 박성자 상임이사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무수한 환우 가족들을 직접 만나보며 매듭지은 결론일 것입니다. 지난 2002년 농구 지도자로 활동하던 동생 박승일씨는 희귀질환인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투병 와중에도 루게릭병을 사회에 알리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박성자 상임이사 역시 그런 동생의 뜻을 이어 승일희망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환우 가족들이 직면한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봐주고,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실효성 있는 방법을 찾는 거죠. 공공기관이나 정부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의 역할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희귀질환 간병은 다른 간병보다 비용이 훨씬 높게 책정돼 있어요. 그렇다보니 가족들이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직접 간병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건 환우 가족들이 현실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양질의 요양병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겁니다. 환자의 가족은 경제활동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환자는 원활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식으로 순환이 필요하죠.”

실제 오는 12월 용인시 처인구에는 국내 최초로 희귀질환인 루게릭병 전문 요양병원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정부 지원금(100억원)과 시민 모금을 통해 건립한, 정부와 민간 차원의 노력이 합쳐진 사례입니다. 정부가 모든 걸 책임질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죠. 민간이 주축이 돼 대안을 마련하고, 이후 정부가 뒷받침을 해주는 형태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완충지대’를 만드는 일은 참고할만한 오답노트가 있습니다. 한국보다 일찌감치 가족 간병이 ‘간병 살인’으로 비화되는 아픔을 겪었던 일본입니다.

20년 전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는 ‘개호(간병·介護)’와 연관된 현상들이 터져나왔습니다. 노노개호, 싱글개호, 개호살인, 개호이직…. 가족 간병 때문에 사회 곳곳에서 불거진 갈등입니다. ‘개호’라는 단어를 ‘간병’으로 바꾸면 어떤 의미인지 곧바로 눈치챌만한 문제들이죠. 노노간병, 싱글간병, 간병살인, 간병이직….

한국도 이에 발맞춰 가족 간병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간호간병 통합서비스’입니다. 환자 주변 가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전담 간호 인력이 간병을 하는 겁니다. 비용 역시 민간 업체에서 간병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80%가량 저렴합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정책이란 비판이 꾸준히 터져나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족 간병 때문에 일상이 흔들릴만큼의 중증 질환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홀로 13년 동안 돌봐온 조기현 작가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는 경증의 일부 병원에서만 시행되고 있어요. 한국은 일본처럼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를 전 병원에서, 그리고 ‘간병 살인’을 막을 정도의 실효성 있는 수준으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죠.”라며 허점을 지적했습니다.

실제 간호간병통합서비스에 대한 수요와 만족도는 높습니다. 그러나 양질의 간호 인력은 수급이 더 필요한 듯 보입니다. 지난해 5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에서 발표한 ‘간병 국민 인식 조사’에서 이런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성인 중 간병 경험자 1천명이 설문에 참여했습니다.

간병 국민 인식 조사

가족 간병을 도맡고 있거나, 갑작스레 가족 중 누군가가 쓰러질 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응급 조치는 아무래도 ‘가족돌봄휴가’ 제도입니다. 노동자의 가족이 질병, 사고, 노령 등으로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해당 휴가를 쓸 수 있도록 지난 2020년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 제도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부는 중요합니다. 개인이 가족 간병을 하며 잃어버린 사회적 기회를 보상할 첫단추이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가족을 간호하러 가야할 상황에서 이런 제도조차 사용할 수 없다면, 가족 간병을 노동으로 인정한 ‘돌봄 수당’마저 온전히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정책과 현실은 꽤 다른 듯합니다.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에서 지난 8일 발표한 ‘공공기관 돌봄휴가제도 활용 실태와 개선과제’ 보고서에는 공공기관 12곳의 종사자 를 대상으로 가족돌봄휴가 사용 실태를 조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정책 시행 이후 4년간 중앙공공기관의 가족돌봄휴가 사용 비율은 평균 12.7%로, 10명 중 1.5명 정도만이 가족돌봄 휴가를 사용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공공기관마저 이런데 민간 기업들의 상황은 더욱 녹록지 않을 것입니다.

중앙공공기관 가족돌봄휴가 사용 비율

사용률이 높지 않은 까닭은 제도가 안고 있는 한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족돌봄휴직을 신청하려면, 휴직 개시 예정일 30일 전까지 신청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렇다보니 장기적으로 간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측이 쉽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이 발생할 때는 휴직을 쓰기 어렵다는 거죠.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휴가를 낸 기간의 급여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급여 지급 수준을 개별 사업장이 정한다는 것인데, 급여가 낮게 책정되거나 무급으로 휴가를 내야 할 경우 해당 제도를 사용하기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간병을 위한 휴직 또는 휴가 기간에 소득을 보장할 방안 마련이 필요한 것이죠.


조기현 작가는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며 효자, 효녀 같은 말로 개인의 몫으로 떠맡겨지는 것에 대해 부당함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조기현 작가는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며 효자, 효녀 같은 말로 개인의 몫으로 떠맡겨지는 것에 대해 부당함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공동체에 주어진 몫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정책을 설계하고 예산을 투입하는 것보다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간 한국 사회를 둘러싸고 있던 ‘간병=가족’이라는 인식이 여러 고정관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족 간병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돌봄자가 자녀일 경우 ‘효자·효녀’로 향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기현 작가는 꾸준히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라고 외쳐왔습니다.

“아들이어서 13년간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저는 절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러니깐 간병은 ‘가족이 (간병) 해야지’, ‘남들보다 어른스럽네, 효자네’ 이런 말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에요. 내 아버지는 ‘아빠’이기 전에 내 눈 앞에 누워 있는 ‘사회적 약자’이고, 제가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이런 약자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렇다보니깐 이런 효자, 효녀 같은 말로 개인의 몫, 가족의 책임으로 떠맡겨지는 부분에 대한 부당함이 컸어요. 우리 모두가 그냥 보통 시민으로서 가족 간병, 돌봄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어떨까 싶었죠.”

사회의 시선에 대한 문제의식은 박성자 상임이사의 이야기 속에서도 묻어났습니다. 그는 동생 박승일씨와 함께 승일희망재단을 13년간 이끌어오면서 겪은 경험을 회상했습니다.

“루게릭병 환우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할 때 저희의 철칙은 안타까운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자는 거예요. 오래 전 동생과 관련한 다큐 영상을 촬영하던 때 저희 가족의 우는 모습이 부각되는 식으로 흘러갔던 기억이 있어요. 승일이가 줄곧 이야기하는 루게릭병 환우를 위한 전문 요양병원의 필요성을 조명하진 않았죠. 그래서 항의를 했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매스컴에서 우리 이야기가 우선시 되지 않고
(대중이 원하는) 주목을 끌기 위한 타이틀로 활용되는 것
효자, 효녀라는 말로 간병 가족을 부르는 것과 맞닿아 있어

박성자 상임이사

그러면서 박성자 상임이사는 간병 가족들이 특별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

“환우의 가족들이 자신들이 처한 힘든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하면서까지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그 이야기가 우선시 되지 않고 (대중이 원하는) 주목을 끌기 위한 타이틀로 활용되는 것. 이런 측면이 어떻게 보면 효자, 효녀라는 말로 간병 가족을 부르는 것과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조기현 작가는 보통의 시민으로서 느낀 가족 간병 경험을 공유하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돌봄의 몫을 한 개인이 짊어지기보다는 ‘n개’로 나눠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겼습니다.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제공

조기현 작가는 보통의 시민으로서 느낀 가족 간병 경험을 공유하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돌봄의 몫을 한 개인이 짊어지기보다는 ‘n개’로 나눠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겼습니다.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제공

사회의 전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해법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현재 조기현 작가는 보통의 시민으로서 느낀 가족 간병 경험을 공유하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병을 맡고 있는 10대, 20대, 30대 청년들의 자조 모임입니다. 돌봄에 관한 이야기를 가정 내에서만, 그러니깐 사적인 영역에 가둬두지 않고 공통의 모임을 통해 공적으로 펼쳐내는 활동을 하는 것이죠.

2인분, 3인분 해내는 청년들
사회가 돌봄의 몫을 ‘n개’로 나눠 분담하길 바라는 의미도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모임 이름은 가족 간병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1인분의 몫이 아닌, 2인분, 3인분의 몫을 하고 있다는 데서 따왔다고 합니다. 아울러 이런 돌봄의 몫을 한 개인이 짊어지기보다는 ‘n개’로 나눠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겼습니다.

“처음에는 청년들의 돌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이런 경험을 사회적인 문제로 같이 풀어가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어요. n인분은 ‘영 케어러’의 자조모임이지만, 중·장년 노년층들도 자신들의 경험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단순히 어떤 고생한 하나의 일화가 아니라 간병할 자유를 확대하고 시민권을 보장 받기 위한 생태계를 다져나가는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이렇듯 자조모임 같은 커뮤니티는 공감대에서 출발합니다. 서로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심리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줍니다. 공동체에 기반한 네트워크이자, 심리적 완충지대를 일구고 있는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족 간병 문제로 얽힌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봤습니다. 요약하자면, 가족 간병을 맡은 가지각색의 시민들을 만나면서 가족간병을 푸는 핵심 실마리는 ‘간병할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을 책임지는 사회적 ‘완충지대’가 수반돼야 합니다.

가정의 달인 5월, 장장 한 달에 걸쳐 달려온 ‘기자들의 기억법 -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는 여기까지이나 ‘가족 간병―일상’을 논의하는 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간병할 자유를 외쳤던 조기현 작가조차도 아직 간병과 일상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리는 중이니 말이죠.

어느새 ‘영 케어러의 아이콘’이 됐지만, 그는 평범한 92년생 청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효자도, 영 케어러도 아닌 가장 보통의 시민. 92년생 조기현씨의 ‘사소한 바람’을 마지막 말로 전해봅니다.

“조기현 개인으로서 꾸는 꿈은 ‘영 케어러의 아이콘이 되지 않기’예요. 가족 간병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더 많은 사회 활동가가 되고, 그래서 저는 잊히는 게 제일 큰 꿈이랄까요. 진심으로 저는 그냥 작가이고 싶고, 그냥 창작자이고 싶고, 그냥 뒤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와 비슷한)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풍부하게 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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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연·공지영·한규준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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