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경인칼럼] 땅이름의 예언

입력 2024-05-28 20:02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5-29 19면
문학경기장 '공찰데'라 불렸다 구술 기록
서구 탁옥봉, 연구기관·인재개발원 모여
마치 앞날 내다본듯… 재밌는 상상의 결과
지명, 한자 음차 대부분… 제대로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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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지명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학산문화원에서 인천 '남구'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로 구술자서전을 만들 때였으니 17년 전인가보다. 그때 문학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 한 분을 인터뷰했다. 옛 부천군 문학면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0여 년간 인천 북성동에 있던 조일양조장에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술 만드는 일도 하였다고 했다. 해방 후에는 17년간 문학동 동장일을 맡아 본 경력을 가지고 있어 주민생활 구술자로서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 노인은 학산마을, 성산마을, 큰도장, 작은도장, 셋도장 등 지금은 사라진 문학산 주변의 마을과 장소들을 짚어가며 이야기하다가, '무주물' 가는 길에 '공찰데'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문학경기장이 되었다면서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 마을 동무들과 뛰놀던 '공찰데'가 정말 축구경기장이 되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경기장은 2002년 월드컵 경기장의 하나로 건립되어 한국이 포르투갈전에서 1대 0으로 승리한 곳이라서 국내외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으니 '공찰데'라는 장소의 운명이 더 신비롭고 극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필자에게 땅에도 팔자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묻던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인천시 서구 심곡동에 탁옥봉(琢玉峰)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탁옥봉에는 신라 때 한 도인이 이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탁옥이란 옥돌을 쪼고 다듬어 보석으로 만드는 절차탁마(切磋琢磨), 땀흘려 학문에 정진하거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데 공을 들인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탁옥봉 산자락에 인천시 공무원 교육기관인 인재개발원과 인천시 도시정책연구기관인 인천연구원, 한국은행 인재개발원도 이웃하여 모여 있으니 탁옥봉이란 이름이 마치 땅의 앞날을 내다보고 지은 것 같기도 하다.

영종도의 국제공항이 오래전 지명의 예언이 실현된 거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영종(永宗)이란 지명을 풀면 '긴 마루'인데 활주로를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영종도의 옛 지명인 자연도(紫燕島)의 제비와 용유도(龍游島)의 용은 모두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명의 한자를 풀어 현재의 결과와 연결시키는 유래담은 재미있지만 상상의 결과로 근거가 박약한 경우가 많다.

문학산 기슭의 '공찰데'가 월드컵 경기장이 된 것은 여러 조건이 맞아서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천년 전에 국제공항이 될 걸 예견하고 땅이름을 지어 불렀을 리 만무하지만 땅이 우리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리적인 위치나 요인이 정치나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지정학(geopolitics)이 있고, 땅이 경제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지경학(geo-economics)이 있으며, 지리적 환경과 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지문화(geo-culture)도 있는 것이리라.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할 것은 지명의 뿌리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다. 그러자면 지명을 표기한 한자에 현혹되지 말고 귀를 열어 소리를 분석해야 한다. 대부분의 지명은 우리 고유어를 한자로 바꾼 음차표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장에 가서 지형이나 지리적 특성을 살펴야 한다. 월미도(月尾島)가 달꼬리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거나 무의도(舞衣島)를 춤추는 선녀의 옷자락과 연관시키는 지명 유래담은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억측임을 확인할 수 있다.

땅이름의 근원을 캐는 일은 번거롭고 품도 많이 들지만 도시 공간에 장소성을 부여하여 주민들에게 친근감을 갖게 하고, 방문자들에게는 위치감각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무엇보다 지명은 활용도가 높은 문화자원이다. 미추홀(彌趨忽)은 인천의 가장 오랜 지명이다. 인천 남구가 미추홀구로 구 명칭을 바꾸었듯이 인천 시민들은 이 삼국시대의 지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단체명이나 상호 등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없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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