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한희선 설치미술가 '사이흔적, 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입력 2024-06-09 19:05 수정 2024-06-09 19:11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6-10 15면

백령도 태극기가 국회에 던진 '순수한 질문'

 

접경지 전시중 많은 태극기에 궁금증
왜곡됨 없이 주민 '보호상징' 깨달아
헌기-새기 맞바꿈 프로젝트로 수집
갈등과제 있는 국회 전시 의미심장


백령도 태극기
한희선 작가가 국회 의원회관 갤러리에 설치한 백령도 태극기들. 2024.6.4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지난 4일 오전 찾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1층 로비 갤러리에 수십 장의 낡디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대한민국 모든 국회의원 사무실이 모인 의원회관에선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지나가는 몇몇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태극기가 왜 이렇게 낡았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극기들의 정체는 설치미술가 한희선의 작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40점의 태극기를 꿰맨 가로 6m, 세로 4m짜리 하나의 거대한 태극기다.



한희선 작가는 2022년 서해 최북단 백령도의 하늬해변에 꽂힌 군사 방호시설 '용치(龍齒)'에 강화도 소창천을 두르는 미술 프로젝트·전시 '무뎌진 기억 : 새김'을 진행했다. 당시 백령도에 머물던 작가는 육지에서는 관공서 혹은 국경일에나 볼 수 있던 태극기를 백령도에선 너무 자연스럽게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고, 궁금증을 가졌다고 한다.

작가는 백령도에서 낡은 태극기를 새 태극기와 맞바꾸는 '헌기 줄게 새기 다오' 프로젝트를 추가로 진행했다.

백령도에 주둔하는 해병대 6여단, 해양경찰서 경비정, 파출소, 수협 사무소, 고봉포·용기포·장촌포·두무진 등지의 어선, 여객선, 민가에 있는 태극기를 수집했다. 어선의 매연으로 뒤덮여 새카매진 태극기, 태풍으로 3분의 2 이상이 뜯어진 태극기, 작은 태극기, 대형 태극기 등 각양각색 태극기를 모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음양조화의 상징인 태극기가 남북 분단의 현장인 백령도에서 분열과 갈등의 과제가 있는 국회에 갔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백령도에선 사방에 태극기가 있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무언가 굉장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의 상상을 했는데, 태극기를 수집하며 어민과 주민들 얘기를 듣다 보니 애국심이라든가, 소위 '태극기 부대'처럼 극성스러운 정치적 이슈 같은 게 전혀 없었어요. 백령도는 국토의 최북단이고, 언제나 북한이 딱 눈앞에 보이는 접경 지역이니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상징으로, 일상으로 태극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태극기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왜곡된 시선은 백령도에선 전혀 느낄 수 없었죠. 그저 순수한 의미로 일상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섬 전체가 무장 경계 태세인 백령도에서 태극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안전을 보장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는 그동안 바스러지고 낡은 사물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이야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오랜 시간 이 땅을 지켰을 누군가와 현재의 젊은 군인들을 시공간으로 연결하고, 거칠고 산화된 시간 만큼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으로의 환원을 위해 굳건히 버텨준 것에 감사와 따뜻한 위로의 시선을 담아 거대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사이흔적, 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인 이유이기도 하다. 전시에선 태극기 이외에도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녹이 슨 흔적에 대한 평면 작품, 백령도와 강화 석모도 어류정항을 둘렀던 풍화된 소창천, 날카롭고 단단한 용치를 부드러운 솜과 소창천으로 표현한 작품 등도 선보인다.

국회가 '2024년 상반기 국회 문화공간 조성 기획전'으로 주최한 이번 전시는 오는 14일까지 이어진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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